돌아보니 저는 참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참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날카로운 시선이 항상 가까운 이웃에게 머물렀습니다.
저 자신의 허물이나 약점은 조금도 성찰하지 않고 이웃들의 부족함에 가슴치고 분노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느님 보시기기 다 그놈이 그놈인데,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 나무란다고, 그렇게 사는 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웃으셨을까 생각하니 큰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한 수도원에 공공의 적처럼 살아가는 수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몸집이 육중하다 보니 동작도 굼뜨고, 공동 작업 시간에 사고만 치지 별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들 조용히 침잠해있는 묵상 시간에 코까지 골면서 잠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식사 시간만 되면 얼굴에 활기가 되살아났습니다.
다른 수사들은 더 먹고 싶어도 꾹 눌러참고 딱 밥 한 공기만 먹는데, 이 수사는 평생토록 삼시 세끼
단 한 번도 안빠지고 꼭꼭 밥 두 공기씩 챙겨 먹었습니다.
겉으로 대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다른 수사들은 주님 앞에 이렇게 여쭙곤 했습니다.
“주님, 저 베드로 수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은 쥐꼬리만큼 하고 밥은 나발처럼 흡입하는 베드로 수사에게 구원이 가당한 일입니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들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토록 주님 안에 갖은 고행과 보속을 다해온 까닭에 삐쩍 마른 다른 수사들이, 그 결과로 천국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 멀리 맞은 편에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오는데, 얼굴이 낯이 익은 것입니다.
가까이서 봤더니, 아니 글쎄, 베드로 수사였습니다.
화가 벼락같이 난 수사들은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 수사가 천국이라니,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람마다 지닌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몫이 다르고,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사실 살아있을 때 저 베드로 수사는 사실 매끼 네 공기씩 밥을 먹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절제하고 또 절제해서 두 공기씩만 먹은 것이란다.
평생 그런 노력한 베드로 사도가 천국에 오지 않으면 누가 천국에 오겠느냐?”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서서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 공생활의 절정기도 지나가고 예수님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들 떠나가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 사도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경쟁 관계 속에 살아가던 예수님의 애제자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를 지목하며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시원시원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사랑받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 베드로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시선은 언제나 이웃들의 결핍과 실수에 가 있습니다.
이웃을 향했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어 우리 자신의 발끝을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남의 인생은 본인에게 대폭 맡겨두고, 우리 각자의 인생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추종의 방식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의 경우 평생토록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했지만, 성모님의 노년을 동반해드리면서, 순교가 아니라 자연사하였습니다.
모든 길이 다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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