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16-2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강연 100도씨’에서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건축 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주호씨의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과 다른 오른 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른 손의 손가락이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도 항상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추고 찍었고 길을 걸을 때도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 앞에서 오른손을 보였을 때 그녀가 놀라는 것을 보고는 더욱 큰 상처와 열등감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년이 되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악수를 해야 할 때는 더욱 자신의 손을 내미는 것이 창피했고,
그러다보니 점점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싫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당에 갔을 때 새 보좌신부님이 오셔서 악수를 청하더랍니다.
머뭇머뭇 거리며 오른 손을 내밀었더니 신부님이 자기에게 호통을 치며 혼을 내었다고 합니다.
뭐가 부끄러워서 손을 자신 있게 내밀지 못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부님에게 야단맞은 것이 자신에게는 더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의 불완전한 손에 대해 부끄러워했음에도 아무도 그런 모습에 대해 야단을 쳐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았지만 신부님은 그를 정상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당당해 질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고나니 ‘두려움은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구인 손에 대해 자신만 부끄럽게 느낄 뿐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받아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 혼자 열등감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자신 안의 괴물이고 그것이 실제가 아니고 허상임을 알게 된다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풍랑 속으로 예수님이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 떱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움을 버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하자 배는 이미 목적지에 닿아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지만 항상 두려움과 함께 오십니다.
그 두려움을 거부하지 말고 내 안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평화는 이미 내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 안으려고 할 때 평화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물고기 잡고 있던 시절 처음으로 예수님이 오른 쪽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해서 많은 물고기가 잡혔을 때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떠나가 주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두려움을 대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려고 하니 풍랑은 잦아들고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실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그 허상 뒤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의 평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두려움도 이길 수 없고 예수님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있습니다.
저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지금도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두렵습니다.
여자를 만날 때는 헤어질 것 때문에 두려웠고,
학생일 때에는 선생님이, 군인일 때는 선임 병이,
신학생 때는 신부님이, 신부가 되니 선배들이 무섭습니다.
아마 그런 두려움을 회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질질 끌려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젠 깨닫습니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두렵게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보이고, 악이 있기 때문에 악이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나의 탓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에게 핑계를 대게 된 것은 이제 자신 안에 죄가 들어와서 상대의 잘못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로 남이 나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내가 잘못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것 또한 상대의 문제입니다.
상대 안에 미움으로 가득 찼다면 내가 아무리 잘 해 주려 해도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행동의 변화로 상대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도록 모든 수단을 다 써봤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놓으니 상대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걱정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나쁘게 보지 않도록 나를 정화하는 것뿐입니다.
정화해서 사랑으로 가득 채워 모든 이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해결 방법도 함께 주십니다.
그러나 외면하면 언제나 두려움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두려움을 통해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으라고 두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위로 올라야 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는 항상 그 두려움 뒤에 있습니다.
두려움을 먼저 품지 않으면 평화는 뒤따라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회피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또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두려움이란 것이 그저 나의 그림자나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뒤에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성체의 겉모습은 밀떡입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겉모습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 뒤에는 반드시 평화가 선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다고 나를 속이지 맙시다.
먼저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합시다.
그래야 자유와 평화가 따라오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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