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코린 12장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우선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 체험을 했을 때,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자신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고 공동체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만나는 사람에게 모두 알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공동체성보다는 자기를 알리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았습니다. 즉, 자신은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신비로운 일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이 낫고, 마귀를 쫓아내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는 것 등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요나의 기적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마음의 변화 이상 큰 표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교만에 빠지게 되고, 마귀의 유혹을 받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모두 우리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를 깨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면, 하느님 신비에 반대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기준을 따져야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공동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놀라운 기적이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 기적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에 예수님의 반응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그들이 당신이 보여주신 빵의 기적에서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내려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늘 공동체를 강조하셨고,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보다는 나만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집중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있다(다윈 킹슬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