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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7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4-07 조회수 : 320

복음: 요한 20,19-31: 토마의 불신앙 
 
주간 첫날, 새로운 창조의 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유대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과 마음을 닫아걸었다. 예수께서는 문이 잠긴 상태에서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셨다. 주님의 육체는 그들과 함께 사셨던 그 육체이다. 그러나 자기들 눈에 보이는 육체에 확신하지 못하므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잠긴 방으로 들어오신 몸을 만지도록 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 여기서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때에는 영혼은 언제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19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시어 파견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절)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려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고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권한을 주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관계 회복은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하느님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라는 뜻은 본래,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완전한 것만 좋아하는지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지 않는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죽음은 알고 있었지만,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본 것이 환상에 불과한 일이 되지 않도록 “직접 보고” 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한다. 토마스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분의 육체와 거기에 난 상처를 전부 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분을 만나기를 고대한 것이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자리에는 토마스도 있었다. 여기서 여드렛날은 교회에서 거룩하게 모이는 날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보아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토마스는 결국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한다. 그는 그분의 육신을 만지고 그분의 신성을 고백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의 모습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다.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토마스가 스승의 육체에 난 상처를 만진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토마스의 불신은 다른 제자들의 믿음보다 우리의 믿음은 위한 것이다.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의심 없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의심하는 자기 마음과 모든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그 상처를 그대로 두신 것은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선물은 부활이 예수님께 새 생명과 권능을 충만케 해주어 새로운 현존형태와 활동 방법을 부여하였다. 이같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같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습의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은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또한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 자기의 재산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모든 형제와 친교를 이루고, 새로운 생명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한다. 이것은 의미가 깊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같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과 피로 세상에 오신"(1요한 5,6)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는 세례성사(물)와 성체성사(피)를 암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부활 팔부 축일을 지내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과 결실로서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 되어 친교를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이라는 선물이 진정한 사랑의 나눔으로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당신의 신부인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며, 구체적인 삶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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