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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4-01 조회수 : 506

마태오 28,8-15 
 
관심만 있으면 부활은 저절로 믿어진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이유가…. 
 
 
신자들과 면담할 때 제가 가장 중점으로 삼는 것은 미사만 나오지 말고 레지오와 같은 단체에 들어가
친교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것입니다.
미사만 나와서는 신앙의 발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신앙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 결과가 공동체이며 그 소속감에서 신앙의 참 행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이것을 매우 꺼립니다. 성당엔 나가야 하는지 알지만, 내가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자꾸 물어보는 게 싫은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엄마가 자신의 가정사를 모르는 본당에 이사 왔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그 본당에서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사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죽은 게 본인 탓이라고 부모는 느낄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상처를 건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당에서 공동체를 만들어 하느님 사랑을 그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삶이 참 부활의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상처는 그 부활의 삶으로 가는 길을 막습니다.
만약 그 부활의 삶이 레지오 단체라고 한다면 상처 있는 사람은 그 레지오 단체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들의 발목을 잡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여 많은 유다인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는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있는 상처가 나의 탓이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탓이건, 아니건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습니다.
그런데도 그 상처 때문에 공동체와 하나 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나의 영광’을 추구하고 ‘세상이 주는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집착하면 결국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신문기자로 그리스도인들의 헛된 신앙을 깨버리려고 성경과 역사를 연구하다가 결국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실화인데 그가 쓴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로 볼 수 있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알려고만 해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는 신문사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그 신문사는 종교색채를 띠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전 경비병들에게처럼 부활의 증거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고 믿으려고만 하면 누구나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려고 달려가는 노력만 있으면 믿어질 수 있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통해 예수님을 알려고 했던 것 덕분으로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이나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애착이 끊어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열 권의 책을 5년에 걸쳐 끝까지 읽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참 부활의 갈릴래아인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비행기를 탄 순간은 신학생 때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날 때였습니다.
몇 년 동안 돌아올 수도 없고,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나라로 갈 때 저는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비행장에는 저를 배웅하러 많은 사람이 나왔었는데, 저는 그들과 지내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후로 참 많이도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쁘게 비행기를 탔던 순간이 언제였을까요? 바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이탈리아 쪽으로는 오줌도 누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이 떨어졌습니다.  
 
하늘로 오르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면, 그 부활은 내가 지금 발붙이고 있는 곳에 정이 떨어져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게 힘들어서 무조건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붙이고 있는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광이 기대되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말려도 스스로 부활을 믿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영광만을 바라면 결코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실 자기 영광만 찾는다면 그는 유익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신학생들은 자기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방학 때 여러 신학생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일자리를 얻어 자기 집에 돈을 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신학교로 돌아갈 수 없고 사제가 될 수도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내가 지상의 부활을 원한다면 천상의 부활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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