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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3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3-30 조회수 : 571

3월29일 [주님 부활 대축일] - 파스카 성야 
 
복음: 마르 16,1-7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땅, 갈릴래아!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해졌을 때 그 부끄러운 곳을 무화과 잎으로 가렸습니다.
그렇게 낮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은 상대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황창연 신부님 강의 중 어떤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반하였는데 경찰에 불응하며 저항했고 결국에는 경찰서장 불러오라고 화를 내다가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저 경찰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낮아지기가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이스라엘 땅을 지리적으로 보자면 높은 곳이 유다지방이고 낮은 곳이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물이 풍부하여 아름다운 자연은 자랑하지만,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산지로 올라갈수록 광야가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갈릴래아 호수와 죽음의 바다인 사해만 보아도 이 지리적 상징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낮아져야만 생명이 넘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려거든 갈릴래아로 오라고
여인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일러주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갈릴래아’는 문자적이고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입니다. 
 
그 날 예수님은 당신 무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 밤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곧이곧대로 믿어 진짜 갈릴래아로 갔다가는 절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호수 주변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이 있고 예수님도 거기서 태어나시고 거기서 자라셨으며 거기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와 반대되는 개념은 사해를 포함한 유다지방입니다.
갈릴래아의 풍요로움에 비해 유다는 높고 척박하고 메마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부활 대축일 성야미사 때 읽는 7개의 독서는 어떻게 갈릴래아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알려줍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이 풍부한 에덴동산에 아담을 살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에덴동산이 갈릴래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모든 인간이 은총이 사라지고 메마른 유다 광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그 갈릴래아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교만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게 하여 믿지 못하게 합니다. 
 
제3독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집트는 유다 광야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파라오는 뱀의 상징이고 교만의 상징이며 사탄의 상징이고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자아’의 상징입니다.
그 영원한 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길은 오로지 주님께서 파견하신 모세를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하였듯이, 새 모세 그리스도는 당신 피로써 우리를 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카인이 아벨의 피 때문에 그 땅에 살 수 없게 된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지배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4독서는 이렇게 우리를 우리 자신의 속박에서부터 자유롭게 구원해 주실 새 모세,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마치 죄로 간음한 우리 부정한 신부들을 찾아 나서시는 신랑처럼 당신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실 분입니다. 
 
제5독서에서는 이를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술과 젖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메마른 땅의 ‘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성전 오른 편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성령의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갈릴래아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성령을 받는 이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제6독서 바룩서에서는 구원의 신랑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언하며 빨리 죽음의 땅인 교만에서 지혜의 샘을 찾아 떠나라고 재촉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별처럼 우리의 길을 결코 잃지 않게 하시기 위해 ‘빛’을 마련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7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마지막으로 그 교회를 통하여 오는 ‘성사’를 통해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주님이 주인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결국 교만으로 끊긴 은총의 샘물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시 뿌려 우리 자신을 갈릴래아 호수처럼 생명이 넘쳐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께 무언가를 요구하던 처지에서 종으로라도 써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로마서에서 우리 자신의 교만을 죽여 그분의 종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분을 따르려면 우리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아 당신 자신의 뜻을 죽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어 부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야 하는 길은 한없이 겸손하여져서 성령으로 가득 차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풍요로운 갈릴래아 지방이 되어야 그 안에 주님께서 아담으로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 18,3-4)와 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뜻에 순명해야만 살 수 있는 죽은 땅의 처지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져야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도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청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3월29일 [주님 부활 대축일] - 파스카 성야 

 
복음: 마르 16,1-7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땅, 갈릴래아!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해졌을 때 그 부끄러운 곳을 무화과 잎으로 가렸습니다.
그렇게 낮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은 상대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황창연 신부님 강의 중 어떤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반하였는데 경찰에 불응하며 저항했고 결국에는 경찰서장 불러오라고 화를 내다가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저 경찰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낮아지기가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이스라엘 땅을 지리적으로 보자면 높은 곳이 유다지방이고 낮은 곳이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물이 풍부하여 아름다운 자연은 자랑하지만,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산지로 올라갈수록 광야가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갈릴래아 호수와 죽음의 바다인 사해만 보아도 이 지리적 상징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줍니다.
낮아져야만 생명이 넘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당신을 만나려거든 갈릴래아로 오라고
여인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일러주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갈릴래아’는 문자적이고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입니다. 
 
그 날 예수님은 당신 무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 밤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곧이곧대로 믿어 진짜 갈릴래아로 갔다가는 절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호수 주변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이 있고 예수님도 거기서 태어나시고 거기서 자라셨으며 거기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와 반대되는 개념은 사해를 포함한 유다지방입니다.
갈릴래아의 풍요로움에 비해 유다는 높고 척박하고 메마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부활 대축일 성야미사 때 읽는 7개의 독서는 어떻게 갈릴래아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알려줍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이 풍부한 에덴동산에 아담을 살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에덴동산이 갈릴래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모든 인간이 은총이 사라지고 메마른 유다 광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그 갈릴래아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교만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게 하여 믿지 못하게 합니다. 
 
제3독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집트는 유다 광야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파라오는 뱀의 상징이고 교만의 상징이며 사탄의 상징이고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자아’의 상징입니다.
그 영원한 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길은 오로지 주님께서 파견하신 모세를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하였듯이, 새 모세 그리스도는 당신 피로써 우리를 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카인이 아벨의 피 때문에 그 땅에 살 수 없게 된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지배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4독서는 이렇게 우리를 우리 자신의 속박에서부터 자유롭게 구원해 주실 새 모세,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마치 죄로 간음한 우리 부정한 신부들을 찾아 나서시는 신랑처럼 당신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실 분입니다. 
 
제5독서에서는 이를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술과 젖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메마른 땅의 ‘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성전 오른 편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성령의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갈릴래아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성령을 받는 이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제6독서 바룩서에서는 구원의 신랑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언하며 빨리 죽음의 땅인 교만에서 지혜의 샘을 찾아 떠나라고 재촉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별처럼 우리의 길을 결코 잃지 않게 하시기 위해 ‘빛’을 마련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7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마지막으로 그 교회를 통하여 오는 ‘성사’를 통해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주님이 주인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결국 교만으로 끊긴 은총의 샘물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시 뿌려 우리 자신을 갈릴래아 호수처럼 생명이 넘쳐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께 무언가를 요구하던 처지에서 종으로라도 써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로마서에서 우리 자신의 교만을 죽여 그분의 종으로 새로 태어나는 세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분을 따르려면 우리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아 당신 자신의 뜻을 죽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어 부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야 하는 길은 한없이 겸손하여져서 성령으로 가득 차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풍요로운 갈릴래아 지방이 되어야 그 안에 주님께서 아담으로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 18,3-4)와 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뜻에 순명해야만 살 수 있는 죽은 땅의 처지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해져야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도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청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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