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르 16,1-7: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 날 부활하셨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제 주님의 부활하신 날 주님의 날로 바뀌게 된다. 옛 시대의 안식일은 해가 떠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밤을 밝힌 촛불 같은 것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경배한 이들은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하여 무덤에 간다.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매우 이른 아침”은(2절)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고귀한 품위를 얻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이른 아침을 경사롭게 만드시고, 당신 부활의 빛으로 빛나게 하셨다. 여인들은 안식일을 지내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열심한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하고(1절) 무덤을 향해 출발하여 새벽에 무덤에 도착하였다. “누가 그 돌을 굴려 내 줄까요?”(3절) 여자들은 돌아가신 분을 만나기 위해 돌을 굴려내야 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의 눈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닫힌 돌을 굴려내면 무덤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 향유를 부으면 부족한 믿음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영광을 믿음의 빛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4절) 이것은 주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실 수 있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이미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천사가 돌을 굴려낸 것이었다. 예수님은 닫힌 무덤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여인들은 무덤으로 들어가 웬 젊은이가 하얀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기서 오른쪽에 앉아 있는 천사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 왼쪽은 현세의 삶을 상징하고 사탄의 세력을 의미하며, 오른쪽은 영원한 삶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생명을 넘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셨으니 부활을 전하러 온 천사는 오른쪽에 앉아 있어야 한다. 천사가 하얀 옷을 입은 것은 부활의 기쁨을 알리는 것이다. 천사가 앉아 있는 자세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제직과 왕직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앉는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나라의 당신 어좌로 오르시는 분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왕좌에 앉는 것은 임금의 행위이고, 희생 제사의 자리에 서는 것은 대사제의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씻어주시는 사제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왕국을 주시는 임금이시다. 그래서 천사들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 그 왕좌에 앉으시려 하늘나라에 가셨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마르 16,5 참조) 나타나기도 했고, 대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루카 24,4 참조) 천사는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6절) 우리는 십자가를 공경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도 죽음이 죽을 것이다.
빈 무덤에서 위대한 사명이 여인들에게 공동체와의 연관에서 항상 유효한 사명이 세 마디로 내려진다. “가라, 제자들에게 알려라, 말씀들을 기억하게 하여라.” 항상 의심하고 있던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말씀이 바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7절) 여기서 이 갈릴래아는 평야 지대가 아닌 갈릴래아 산, 예루살렘이다. 거기서 하늘에 오르실 것이다. “거기서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성령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 결정적 모상을 뵙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계시요,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역사라고 할지라도, 이 부활 사건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 예수의 모습은 바로 영광스럽게 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 부활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고, 선포되어야 하는 신비이다. 영광의 주님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큰 대가가 지급된 사건이다. 우리가 전할 부활의 신비도 우리 자신이 지고 가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신비이다. 이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 신앙인은 매 미사 중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하고 응답하지 않는가? 이 미사 중에 우리의 삶이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힘차게 선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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