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요한 18,1-19,42
기쁨의 고통, 기쁨의 십자가!
젊은 사제 시절 저는 갈곳없는 아이들을 위한 소규모 아동 양육 시절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제가 주로 담당했던 역할은 각 집에서 사고뭉치 아이들, 문제아들이 생기면 본부로 데리고 와서 모아서, 같이 지내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보내면 백 퍼센트 땡땡이치고, 선생님들 괴롭히고, 제가 모아서 공부를 좀 시키려 하면 즉시 졸아버리고, 저는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에 하루 온 종일, 일년 사시사철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아침 먹고 축구하고, 점심 먹고 농구하고, 저녁 먹고 게임하고, 주말 되면 피시방, 노래방, 등산 낚시 다니고, 정말이지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한번은 아이들 네 명을 데리고 동네 목욕탕을 갔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절대로 크게 떠들거나
장난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줬습니다.
그런데 장난꾸러기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냉탕 속에서 수영을 하고, 물장구를 치고, 크게 떠들고 싸우고,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어르신 몇 명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기 아이들 보호자 누구요?”
그때 저는 온탕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너무 창피한 나머지 몸을 더 깊숙이 탕속으로 담구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그러는 겁니다.
“이 신부님이 우리 아빠예요!”
그러자 어르신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며 그러셨습니다.
“세상 말세네. 요즘은 신부님들도 장가를 가시나?”
돌아보니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그때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매알 아이들 때문에 상습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그때 늘 1톤 트럭에다가 아이들 생필품 싣고 각 집에 배달을 다녔는데, 이집 저집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떤 때 운전하다가 심각한 교통 정체가 생기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려놓고,
일분, 이분, 핸들에 머리를 쳐박고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가 뒤차가 빵빵 하면 일어나서, 다시 운전을 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늘 온 몸이 피곤하고 뻐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겪은 고통은 괴로움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의 고통이었습니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을 하면서 겪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인 것입니다.
오늘 성금요일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고통 역시 그런 고통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내 한 몸, 몸이 으스러지도록 고통스럽지만, 나로 인해 너희는 살겠구나, 너희는 구원받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겪는 기쁨의 고통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떨리는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 고통 잠시 후면 끝날 것이고, 내 인내와 희생으로 너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기쁨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이었음을 확신합니다.
고통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고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통에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면, 그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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