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26,15)
'탐욕의 배반!'
오늘 복음(마태26,14-25)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말씀'입니다. 배신자 유다 이스카리옷이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가치가 '은돈 서른 닢'(약1200만원)에 불과하다니???
마태오 복음은 다른 복음과는 달리,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를 '탐욕'에서 찾습니다. 성주간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매우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사용한 마리아의 모습과 큰 대비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사는 길, 이제와 영원히 사는 길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과 죽음이 곧 부활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고 보면 유다의 배신 행위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도구였고, 필요했던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배반자 유다는 하느님의 자비로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배반과 다른 결정적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후,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슬피 울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종종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탐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현실 앞에 놓여져 있는 근심과 걱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잊고 사는 배반을 하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육의 행실들, 곧 교만, 인색, 시기(질투), 음욕, 분노, 나태(게으름)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성주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하는, 전례주년 안에서 가장 거룩한 주간입니다.
나의 육적인 충동들을 잠시 내려놓고, 극진한 사랑의 표징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 창세기 37,11)
(이병우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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