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교환: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증거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일과 같습니다.
종이에 성체가 피로 변해 스며든 카시아의 성체 기적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스며드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어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처럼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라고 합니다.
마치 야곱이 이사악 앞에서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기기만 하면 상속을 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도 무언가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도 하느님을 잉태하시기 위해 신 인성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기 겉옷을 깐 이유와 같습니다.
겉옷은 그들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교부들은 이를 ‘거룩환 교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사야서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에도 나와 있고, 신약의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1코린 8,9)에도 잘 표현됩니다.
가장 완전한 거룩한 교환은 성모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육화론 54,3)라고
표현했고, 성무일도 제1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 제2 저녁기도, 후렴 1에도
위 교부들의 신학을 받아들여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케 하셨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제가 본당신부를 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희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에 있어
병자성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모습을 처음 본 저는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온몸이 노란색이었고 얼굴은 부어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눈동자는 거의 흰자만 보였습니다.
그 청년에게 병자 성유를 바르는데 얼핏 바이러스가 저에게 옮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이 닿지 않으면 어떻게 성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닿으려면 상대의 바이러스가 내게 옮겨올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합니다.
뭔가를 주려면 필연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거룩한 하느님께서 신성을 내어주시기 위해 인간의 인성을
받아들이신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좋아서 인간의 인성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시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 인성과 죄를 내어드리고 그분의 신성을 받아 하느님 앞에 의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 앉아 있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저에게 푸르고 맑은 물과 같은 것이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또 저에게서는 똥과 같이 더러운 것이 예수님께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거룩한 교환’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거룩한 교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상황은 부모와 자녀 사이입니다.
자신을 잔인하게 살해한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라.”라고 하신 어머니나,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교통사고로 죽이려 한 아들의 선처를 바라며 경찰서로 휠체어를 타고 찾아온 어머니를 보십시오.
저도 채변봉투를 재래식 화장실에 빠뜨렸을 때 아버지께서 그냥 아버지라는 이유로 손과 옷에 똥을 묻혀가며 그 봉투를 건져 올려주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해야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알아보는 방법은 이 거룩한 교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토요타 차량을 리콜하고 있다면 그 회사는 토요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집니다.
이제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가 우리 구원을 결정합니다.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비웃은 함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눈물의 겉옷으로 나의 모든 더러움을 짊어지신 분을 덮어드려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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