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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4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3-24 조회수 : 402

복음: 마르 15,1-47: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오늘의 전례는 분위기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것 같으면서 그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모든 것이 수난과 죽음을 향한 비탄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오늘을 성지주일 혹은 수난주일이라고 하였다. 오늘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있다. 구약에서 야훼의 종은 비록 혹심한 능욕을 당하여 자신의 사명이 실패하는 것 같은 상황으로 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39절) 하고 말하였다. 복음에는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38절)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구약의 성전 기능이 이미 끝났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분의 신비의 베일을 찢고서 내부를 열어 보임으로써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의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서 계시된 나자렛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이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서,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축성해주는 사건이다. 이것은 권능의 행위가 아니라, 나약함의 행위,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 나약함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여(14,33) 계셨고,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15,5), 고발에 대한 무응답(15,5), 십자가를 질 기력이 없어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으로 십자가를 지심(15,21), 십자가 밑에서의 조롱 즉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15,31-32)로써 그분의 나약성이 극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바로 극한에 이르는 나약성에서 나타난다. 백인대장이 이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15,39)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나약성은 권능으로 바뀔 것이다.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14,61) 라고 물었던 대사제에게 당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14,62)라고 대답하시며, 마지막 심판자로서의 당신의 품위와 권능을 말씀하신다. 
 
이제 자신의 나약성을 통하여 권능이 드러나는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도전이 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도전에 합당한 응답을 하도록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십자가의 도전은 복음에서 예수님의 주위가 비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14,71),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난 제자들(14,50), 환호하던 군중이 바랍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친다(15,6-15). 이러한 배반의 분위기 속에서 용기 있는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의 더 큰 사랑과 충실성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기민한 통찰력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품위를 회복하고 있다(15,40-41).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때에, 참담한 고통의 때에 홀로 남아 계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14,27). 십자가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곧 신앙 때문에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받아들일 용기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 우리의 사회, 즉, 뱃속에 든 아이를 살해하거나, 남편이나 아내를 배신하거나, 자기를 거슬러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아 없애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자기의 쾌락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풍토에서는 대단히 힘들다. 우리는 십자가의 찬란한 징표를 세상에, 그리고 가치관의 혼돈 속에 헤매고 있는 오늘에 다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인간 생활의 맛을 더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요청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를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육화하셨을 뿐 아니라, 그런 사실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8절) 철저한 비움의 보상으로 얻게 되는 영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2,9-11). 
 
이제 성주간을 지낸다. 오늘 전례의 환호와 비탄이 함께 있는 것같이 이 성주간에도, 또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나약성과 십자가의 도전이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서 갈 때 구원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그래서 구원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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