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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3-21 조회수 : 611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예수님보고 마귀 들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하시며 당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당신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이름을 당신에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있는 나”(I AM)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준 당신의 이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하느님의 본성이 되어 죽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왜 죽음을 맛보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음의 개념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TV레셀’ 유튜브 채널에 이미 전이가 일어나 손을 쓸 수 없는 ‘위암 4기 시한부 판정받은 600억
자산가의 고백’을 보았습니다.
이 사업가는 일만 하다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판정을 받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고 의사는 항암 안 하면 6개월, 하면 1년 정도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배를 열어보았는데 암이 온몸에 전이 되어 있어서 손을 쓸 수 없어 그냥 닫아야 했습니다.
이분에게 제일 안타까웠던 상황은 태중에 임신한 딸의 탄생을 볼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왜 아픈데 일만 계속하세요?”라는 질문에
“누워만 있으면 뭐 하겠어요?”로 대답합니다. 이분은 사는 마지막 날까지 일하다 죽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약으로 버티며 10년을 매일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분에게 채널 대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못 보고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어쨌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시한부 판정을 벗어났을 때의 기쁨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아이가 태어났을 때가 더 기분 좋죠. 아픈 거 뭐 이런 거를 떠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서요.” 
 
이 사람은 죽음이란 것이 삶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삶이 끝나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일부입니다. 죽음의 고통이 자녀의 탄생 기쁨보다 작습니다.
그러면 이분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죽음은 가리옷 유다와 같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만들지 않고 삶이 끝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것은 죽음의 가치를 아직 삶과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작은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이 죽음들이 이웃을 위해 쓰였다면 그 마지막 죽음의 가치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한순간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죽음의 마지막일 뿐입니다.  
 
『두 개의 산』에 이런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 사는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4년 전에 21년을 부부로 함께 살았던 아내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병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시간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내면적인 성찰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성장했고 또 각성했다는 점입니다.
내가 성장한 것의 정말 많은 부분이 아내의 죽음에
따른 결과였다는 깨달음에 나는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파커 파머는 《다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을 두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하나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심장이 활짝 열리면서 자기 자신과 세상의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활짝 열리는 이미지는 아내가 죽은 뒤로 지금까지 내 인생의 추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왔습니다.”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나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도 의미 있는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이 사람에게 죽음은 더는 죽음이 아닙니다. 삶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신도 그 십자가의 삶을 따라 살 것이기 때문에
삶과 단절되는 절망적인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됩니다.
산청 성심원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 오신 유의배 신부님의 방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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