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의 효과는 정확히 이렇게 드러난다
제가 어렸을 때 뒤란에서 야한 여자 사진을 보다가 아는 형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둥그렇게 꾸겨서 담 밖으로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형은 그런데 굳이 그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논은 그것을 잘 감추어 주어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형이 찾았는데도 일부러 모른 척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그 일로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논을 본받았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찾아내려던 동네 형을 본받았을까요?
이상하게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본받게 됩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들추어 상처 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그러면 자기 잘못보다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만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 자체가 용서를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순결했다는 뜻입니다.
자꾸 타인의 잘못을 드러내려 한다면 자신이 얻는 게 있어서입니다.
반면 드러내고 싶은 게 없다면 이미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았기에 굳이 남을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아프게 하면 나도 아픕니다. 요셉 성인이 약혼 중에 임신하고 온 아내를 보면서도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그러한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요셉 성인의 의로움이 이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는 사람은 그것으로 반드시 얻는 이득이 있기에 타인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재판관에게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재판관을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재판관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4×7=27이라 말하였느냐?”
그러자 고집 센 사람이 말합니다.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매질하여라!”
결국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매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똑똑한 사람은, 매질을 당하는 내내 재판관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지만, 재판관은 그런 그의 하소연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왜 굳이 받아들이지도 않으려는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면서까지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할까요?
나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하는 틀린 면이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을 굳이 심판하고 잘못을 드러내며 자기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 직후’입니다.
이때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그 사실을 믿는다면 타인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용서받았음을 의심하게 된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또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어 자기를 정당화하게 마련입니다.
고해성사를 본 즉시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누구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됩시다.
‘굳이 남의 잘못을 들추어낼 때 내 맘만 괴롭게 되는 성 요셉과 같은 정결하고 의로운 상태’로 살아갑시다.
이것이 심판 앞에서 의로운 상태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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