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요한 3,14-21: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오늘은 기쁨의 장미주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어렵고 힘든 결실을 촉구하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심판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빛으로써 세상에 보내 주셨다. 이 빛을 피해 숨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역대기 하권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를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비탄에 찬 간절한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약속의 하느님께서는 키루스의 해방칙령을 통해 한 가닥 희망을 보여주신다. 이것으로 바빌론 유배가 끝난다. 이 마지막 키루스의 해방칙령이 오늘을 기쁨의 주일이라고 하는 것 같다.
복음에서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심판의 주제가 전개되고 있다. 그 심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드러난다. 인간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 속에 살 때,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 반대로 그 사랑의 선물에 대해 문을 닫을 때는 자신 안에만 있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먼 사람이 되고, 구원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주위의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는 때, 어둠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다.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나를 심판으로 이끄는 것이다. 높이 들리심이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높이 들릴 수 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것은 오직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새로 남이란 오로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의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도 높이 들릴 수 있다. 예수께서 수난이 가까웠을 때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하신 것은 당신 사랑의 힘을 확인시켜 줄 뿐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 높이 들리신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통해 계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 어떤 면에서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느님의 사랑이 심판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이고,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담보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택하셨다. 인간에 대한 심판은 바로 이 사랑의 위대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빛을 거절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생명까지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 심판의 선포는 바로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외면할 때는 자기 자신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에 대해 그 빛을 탓할 수는 없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9-20절). 우리의 행실이 드러날까 봐 빛을 멀리하는 것, 심판을 피하려고 빛을 멀리하는 것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심판이 된다. 빛을 멀리한다는 것은 어둠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단죄받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1요한 4,16 참조)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의 아집과 오만불손한 자만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보다는 해방의 행복한 결과에 주안점을 두고 기쁨으로 초대한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4-6). 이처럼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은 사순절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가까이하는 삶이 되어 높이 들리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과 더불어 변화될 수 있는 삶을 바치기로 하고, 또한 이 사순시기가 우리가 높이 들리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로 되어야 한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광,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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