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6,1-6.16-18
불교와 가톨릭에서 말하는 고행의 차이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순절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자선-기도-단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이것을 실천할 때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매번 강조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자선-단식은 일종의 도구요 무기입니다. 도구로 사용되려면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망치라면 못을 찾아야 합니다.
또 무기라면 적이 확실해야 합니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군인에게 총을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총을 줬다면, 누구에게 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기에게도 이웃에게도 해가 됩니다.
일단 기도-자선-단식이 도구라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일까요?
기도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자선을 하면 청빈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단식하면 절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정결해집니다.
곧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얻게 됩니다.
이 덕을 꽃피우면 무엇일 좋을까요? 사랑이라는 하느님께서 그 정원에 살게 됩니다.
기도-자선-단식은 복음삼덕을 자라나게 하는데, 기도-자선-단식이 없다면 복음삼덕과 그로 인한 사랑이 실천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반대는 이기주의입니다.
자기 행복만 바라는 이들은 내가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기주의자는 자기만 가지려 합니다.
또한 절제가 없습니다.
자기 먼저 먹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기도-자선-단식이 삼구(三仇),
곧 세속(소유욕)-육신(성욕)-마귀(교만)을 쏴서 죽이기 위한 총과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교의 교리와 차이를 보입니다.
불교도 인간의 욕구가 고통의 원인이라 보았습니다.
그 욕망을 이기기 위해 고행을 하고 자신과 싸웁니다.
그러나 욕망이 사라지면 행복이 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점 고행의 방향을 찾으려는 방향으로 불교도 발전하게 됩니다.
영화 ‘삼사라’는 “어떻게 하면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타쉬라는 수도승은 3년 동안 동굴에서 나오지 않고 고행합니다.
그렇게 육체를 이기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믿었지만, 한 방울의 물은 다시 육체가 힘을 얻고 아기에게 젖을 물린 여자를 보았을 때 사라지게 됩니다.
타쉬는 욕망을 이기기 전에 욕망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겠다며 환속합니다.
여자와 결혼도 하고 아기도 얻게 됩니다.
농사도 짓고 돈도 어느 정도 법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점점 탐욕에 물들어갑니다.
심지어 처제와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처제가 언니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세상에 환멸을 느낍니다.
역시 모든 고통은 욕망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때 스승이 죽으며 타쉬에게 보낸 편지를 받습니다.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기를!”
타쉬는 한 가지 욕망을 정복하기 위해 다시 삭발하고 집을 떠납니다.
아내가 뒤쫓아오며 말합니다.
“한밤중에 자식을 버리는 어머니는 없어요. 남자만이 그럴 수 있죠.
싯다르타는 병자들을 가엾다고 여겼어요.
그가 깨우침을 얻기 훨씬 이전부터요.”
아내는 알고 있었습니다.
참다운 고행의 의미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타쉬는 윤회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원만 빙빙 돌기 때문입니다.
그때 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않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타쉬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고행의 방향이 사랑이라는
방향성을 잃으면 아무리 고행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삼구는 사랑에 반대되는 욕망입니다.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물을 빼내야 합니다.
그 작업이 우리가 말하는 고행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사랑이 증가하지 않는 사순절은 더는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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