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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1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2-11 조회수 : 649

2024년 2월 11일 연중 제6주일

 

 

1989년 조지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테서가 이끄는 사회심리학 연구팀은 11세에서 14세 청소년이 있는 가족들에게 텔레비전 채널 선택이나 숙제하는 시간 등과 관련된 모든 의견대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조사 결과, 부모와 의견대립이 많은 청소년이 더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며, 학교생활을 더 잘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와의 의견대립에 대해 열린 관점으로 대화를 풀어갈 때 가능했습니다.

 

종종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어떤 간섭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다면서 전혀 대화하지 않고 그냥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친한 친구와 의견 차이로 인해서 심하게 싸웠고 역시 기도만 하면서 이 친구와 예전 관계로 다시 돌아가길 바란다고 하십니다. 과연 기적처럼 그런 일이 생길까요?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관점입니다.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있는 은행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권총을 든 강도는 창구 여직원에게 총을 겨누며, “천만 원 내놔!”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천만 원을 내주거나, 아니면 몰래 비상벨을 눌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원은 강도를 바라보며, “천만 원은 왜요?”라고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 말에서 강도는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강도는 총을 내려놓고 지금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이야기했고, 직원은 은행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천만 원 내놔!”라는 말에서 대화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에서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강도하고도 이렇게 대화가 되는데, 왜 다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해야 주님과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병은 무서운 병으로, 공동체는 나병에 걸린 사람을 멀리하고 부정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 곁에 갈 수 없기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이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 나병 환자를 내쳤을까요? 아닙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을 절대 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가온 사람의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행동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만이 주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낫게 하셔서 다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이런 겸손한 모습보다는 맡긴 것을 찾는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라며 주님께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겸손, 그래야 주님과도 또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얻은 교훈이 있을 뿐(트롸일라 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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