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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2-02 조회수 : 762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복음: 루카 2,22-40 
 
<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을 보았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상처’에 관한 내용인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는 ‘치유’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됩니다.
문방구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존심 때문에 소원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먼저 학교로 뛰어갔던 같은 반 남자친구,  
 
바쁜 탓에 소원이 머리를 묶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못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의 착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소원이는 결국 그 악마 같은 사람 때문에 대장까지 파열되어 평생 옆구리에 호스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 아이와 가족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밉니다.
그렇게 비싼 일인 실에 입원을 해야만 했고 가족은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게 됩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적금을 털어 도와주고 아이들까지 소원이를 위해 모금을 합니다.  
 
혼자 학교로 갔던 같은 반 남자 친구는 자기가 함께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유되기는 소원이의 상처는 너무도 큽니다.
특히 옆구리로 변이 새어나와서 그것을 닦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가 그 무시무시한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아빠가 병실에 들어오면 부끄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 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 덕분으로 학교도 갈 수 있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나쁜 아저씨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아프게 한 만큼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원이는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며 아빠에게 농담도 하는 그런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범죄자는 짧은 쾌락으로 자신의 온 인생을 맞바꾸었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지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다가는 그것이 내 안에서 독이 되어 나를 죽이게 됩니다.

봉헌은 사랑하면 당연히 주어야 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의 희생입니다.  
 
소원이 아빠는 소원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소원이는 그 제물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아빠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봉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향이 자신을 태워 아름다운 향기를 올려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한다면 자신을 소진시키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가난해지려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금지된 것까지 가지려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신의 봉헌으로 기워 갚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당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그분이 당신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우리 죄와도 직결됩니다.
죄란 마땅히 봉헌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푼젤’이란 디즈니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불로초와 같은 꽃이 한 송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로초는 수백 년을 산 마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불로초를 감추어놓고 자신만 사용하여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와 아기까지 생명이 위험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녀가 감추어둔 꽃을 뿌리째 뽑아서 왕비를 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는데 그 공주의 머리카락은 공주가 노래 부를 때마다 금색으로 변하며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되고 젊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그 공주를 몰래 훔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두고 자신만이 또다시 그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탑 위에 한 도둑이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그 도둑은 왕궁에서 왕관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 탑까지 숨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몰래 그 훔친 물건을 감추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면 나중에 그 왕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마라고 속여 왔던 마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 왕관을 돌려주면 그 남자는 바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왕관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라푼젤을 참 부모님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마녀는 더 이상 공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다 그렇듯이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을 찾아준 그 도둑과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라푼젤이라는 공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할 줄 알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것이 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 생명나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봉헌하시기에 그분을 되돌려 받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을 영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는 못된 소작인들 때문에 주인의 외아들인 당신이 돌아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봉헌하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그 생명나무는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버립니다.  
 
마녀가 라푼젤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왕국과의 관계단절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했던 어린이 성추행범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봉헌축일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롯이 다시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내 안에서 독으로 변하여 나를 죽이게 됩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 가보가 ‘돈을 똥처럼 여겨라!’라는 집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봉헌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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