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2,13-17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면 실질적 무신론자가 탄생한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한 여자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녀는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얻은 우리나라의 유명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술집 여자와 외도를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견딜 수 없어 뭐 그리 잘난 여자인지 얼굴 한 번 보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꿈에 그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눈이 매우 크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이무석 교수에게 정신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혹시 눈이 작은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무의식적으로 남편이 그 여자가 눈이 크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쌍꺼풀이 없을 뿐 실제로는 눈이 작지도 않고 예쁜 얼굴이었습니다.
눈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긴 것은 동생 때문이었습니다.
딸 둘인데 자신은 첫째고 둘째가 태어났을 때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아빠가 둘째만 좋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아빠처럼 쌍꺼풀이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녀는 아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동생도 잘 돌보고 공부도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빠는 동생만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아빠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남편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자존감과 직결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얼마짜리라고 가격을 매겨주는 것과 같고 자녀는 그 가격을 믿고 그 가격만큼 살아갑니다.
사랑을 못 받았다고 믿으면 그 떨어진 자존감을 행위로 채우고 극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행위’에 치중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발생합니다.
며칠 째 계속 저의 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고 있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인 하느님의 자비를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게 되면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게 되고 그러면 굳이 행동으로 자신을 하느님처럼 높이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지 못하니 이런저런 행동으로 하느님 자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 집중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주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은 무시하시고 죄만 짓는 세리와 죄인들과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어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되는 것이지 단순한 율법준수에 의해 구원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로마 3,20)
그런데도 자칫 교리를 가르칠 때, 이러저러한 규정들을 잘 지키면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질적인 무신론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 믿음의 공로 외에 더 요구되는 행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바로 죽은 아기들이 선한 행위가 없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또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선행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에서 나오는 이기적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경고합니다.
혹자들은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는 말씀 때문에
믿음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자신이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으면 곧바로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만약 믿음이 들어왔다면 실천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천은 믿음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지 선행을 해야만 구원받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잘 지킨 것을 주님 앞에서 감사하게 여기며 마치 율법을 잘 지킨 것이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되는 길인 것처럼 믿었습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잘 지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내가 내 아들을 뭐 하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했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아들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인간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만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라고 말씀하십니다.
행위에 집중하게 만드는 교리교육에서 벗어납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상관없는 구원을 추구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이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로마 11,6) 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옵니다.
행위는 믿음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교리교육의 핵심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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