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남도 쪽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짠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하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같은 말과 동의어입니다.
얼마 전 자주 다니는 한적한 길목에 누군가가 유기를 한 반려견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영문도 모른체 버려진 강아지는 언젠가 주인이 데리러 오겠지, 하는 생각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친구의 얼굴을 보니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졌는지 모릅니다.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것 저것 주렁주렁 팔에 달고 있는 한 아이 얼굴을 보았습니다.
정황을 보니 어린 암환자였습니다.
아이를 케어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젊은 엄마까지....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지던지요.
오늘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다양한 병고와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을 향한 짠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짠한 마음은 곧 연민의 마음이요 측은지심일 것입니다.
영어로 적합한 단어는 compassion일텐데, 이는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괴로워 하다’ ‘함께 고통 당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compassion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한 가련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던 대표 인물이었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의 나병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사람들이 다들 고개를 저으며 피해갈 정도였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인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소외당하며 살아왔던 그는 이번이 자신의 일생일대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즉시 짠한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손이 썩어 문드러진 나병 환자의 환부에 가 닿습니다.
그리고 외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련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피상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도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것은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한 사랑의 물줄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신 존재 전체로, 혼신의 마음을 다해 우리 각자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보내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치유, 회복, 귀향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일상이었는데, 비참하고 어두운 그의 삶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꼭 치유되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자신을 치유시켜주실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확신이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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