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2,16-21: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며,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68년부터 이날을 세계 평화의날로 제정하셨다. 마리아께서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 주시면서 새해의 모든 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목자들이 천사가 그들에게 알려준(루카 2,11) 구세주를 찾아가는 장면이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목자들의 관심은 오직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있다. 그들이 찾고 있던 것도 아기였고, 그들이 본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도 그 아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아기에 대해 말하면서 그 옆에 있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19절) 간직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목자들이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기쁨이 퍼져나가도록 하지만, 마리아는 그 일에 담겨있는 보다 깊은 의미와 주님의 가르침들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리아의 모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아들의 신비에 언제나 보다 철저히 참여하고자 하는 사랑에 불타는 모성이다. 그 모성은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까지 동화하는 그런 모성이다. 이런 내용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21절). 할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 계약의 징표였다(창세 17,11). 남자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예수께는 구원업적인 수난의 전표이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십자가의 죽음에 처할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 때문에 마리아의 모성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더욱 풍요롭다.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피로써 생겨난 자기의 자녀들(요한 19,26)로 받아들인다. 마리아는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역할에 종속되어있는 모습을 우리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과 율법을 대립시키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갈라타서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주신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극하여 악의 힘에 억눌렸던 우리를 속량하시어(참조: 갈라 4,5), 당신 자신의 신적인 자녀 관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5).
이 자녀는 법적인 권리를 얻는 것보다도 우리의 존재 자체를 다시 나게 하는 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로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7).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기 위해 마리아가 필요하셨다는 것이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갈라 4,4-5). 때가 찼을 때, 즉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려는 때,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율법의 속박을 없애기 위해 율법의 지배하에 태어나신 것처럼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 여자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갖는 우리의 하느님의 자녀 관계도 어느 정도 마리아의 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의 구세사 안에서의 역할을 볼 때, 마리아가 어떻게 평화의 주인(이사 9,5)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해의 평화에 대한 표징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평화는 바로 자녀들-형제들의 관계를 생기게 하는 모성이라는 표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녀-형제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용서하고, 섬길 수 있게 된다. 결국 평화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선물이며, 그 모성을 통하여 생명의 신성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공격은 모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태중에 잉태된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또한 젊은이들을 그릇된 길로 몰아가는 사회적 폭력의 원인이란, 바로 폭력을 쓰는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모성적 사랑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 즉 그 사랑의 결핍으로 모든 것을 헛되이 여기고 누구에게나 반항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평화의 상징이며, 마리아의 모성을 펼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평화의 창출자이시다. 이 평화는 나약함이나 겁 많고 비겁한 이들의 무감각과 혼동되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51-52).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민수기의 대사제가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이유를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제 이 축복이 마리아의 미소와 함께,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한 해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새해를 봉헌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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