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갑곶성지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미사 후에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미사 때 계속 저만 보고 계셔서요.”
이 자매님이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 뵌 분이었고 또 미사 중에 특별한 행동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이 자매님을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이 자매님은 제가 미사 중에 자기만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예전에 교수법 강의를 들을 때, 연극 배우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은 객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조명이 배우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맨 뒷자리를 바라보면서 연기하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자기와 눈을 마주치며 연기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시선은 배운 대로 늘 맨 뒷자리였습니다(사람들은 제 시선을 피하려고 맨 뒤에 앉지만, 사실 제일 잘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착각 속에 삽니다. 운전할 때 내가 가는 차선만 느리게 가는 것 같고, 줄을 서면 나의 줄만 짧아지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삶에서 하는 커다란 착각도 있습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사는 것 같고, 고통과 시련은 나만을 찾아서 오는 것 같다는 착각입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런 생각의 착각 속에 있을 뿐입니다. 착각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께서 만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이신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셨고, 그 믿음을 통해 가장 복된 분이 되셨다는 찬양이었습니다. 사실 엘리사벳 성녀는 나이 많은 상태에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울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의 이목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라면서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계셨기에, 더 큰 믿음 안에 있는 성모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 있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삶을 원망하는 착각의 삶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엘리사벳 성녀나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 자기 삶이 새롭게 보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잘살고 있구나. 나의 삶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구나….”
오늘의 명언: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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