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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3-12-21 조회수 : 902

루카 1,39-45 
 
자기를 긍정하려면 성당 다녀도 소용없는 이유 
 
 
저에게 지금 교황님이 거의 이단이라는 식의 카톡을 보내오는 분이 계십니다.
세례명도 있고 신자인데 어떻게 사제에게 계속 교황님을 거의 악마처럼 여기는 이들의 글을 보낼까요? 

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늘 나라 열쇠를 지닌 베드로가 계시고 사도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교황이시고 사도들은 주교들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 안에 은총이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며 성체나 고해성사한다면 효과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은총은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만의 것입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아프다며 돈 요구하는 집 나간 엄마, 도와드리는 게 맞을까요?’라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사연자는 초4 때 엄마가 집을 나가셨는데, 최근에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운을 뗍니다.
엄마는 이혼했을 때 한 달 정도 아빠가 큰 사고를 당해 자신들을 한 달 동안 돌봐줘야 했는데, 병원에 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아빠에게 애 돌봐주는 값으로 100만 원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또 고3 때 약 3개월을 함께 생활했는데 같이 살던 집 보증금을 다 까먹었다며 천만 원을 달라고 요구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천만 원, 언니는 300만 원 주고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말처럼 딸의 양심을 건들며 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와주지 못해 엄마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친척들에게 날아올 따가운 시선이 두렵다고 합니다. 
서장훈은 “평생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으면서 고작 스무 살짜리 딸한테 겨우 석 달 생활했다고 천만 원을 내놓으라는 엄마가 사람이냐?”라며 크게 격분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일한 부모인 엄마를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는 사연자에게 서장훈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너도 네 삶을 찾아.”라고 충고합니다.
사연자는 잘 받아들이고 기분이 좋아져서 떠났습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자신이 찾아온 사람 안에 은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부정하고 그 말을 따릅니다.
만약 자기가 옳다는 마음으로 은총을 받겠다면 어떨까요?
절대 그 은총이 은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사연도 나왔습니다.
사연자는 14년 동안 서울 올라와서 한 달에 약 천만 원씩 열심히 일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 결혼도 못 하고 나이가 마흔이 다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속초 고향에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돈을 서울에서 더 벌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보살들은 묻습니다.
지금 돈을 얼마나 저축해 두었느냐고. 의외로 적습니다.
14년 동안 모은 돈이 고작 1억 5천입니다. 사기당하고 투자를 잘못해서 다 날려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집이 세 채나 있고 가게를 차릴 땅도 있습니다. 
 
보살들은 어머니의 그 땅이 탐나서 그러는 것 같아 의심스럽습니다.
1억 5천으로는 건물을 짓고 식당을 차리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천만 원씩 버니까 조금 더 자주 어머니를 찾아뵈라고 조언합니다. 
 
그러자 상담하러 온 사람은 어머니가 자주 오는 것도 귀찮아하신다고 말합니다.
아프신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는 제주도와 일본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요? 자기가 이런 처지라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또는 귀찮아하는 어머니가 땅을 자신에게 주고 좀 도와주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보살들을 찾아왔다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형이 둘이 있는데 한 명은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삽니다.  
 
아무리 조언해주어도 다 튕겨내는 이 다 튕겨내는 이 사람에게 서장훈과 이수근은 말투부터 고치라며 “그렇게 답을 잘 알면서 여길 왜 왔어.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 지릅니다.  
 
위 여자 청년은 “엄마 걱정하지 말고, 네 행복을 찾아!”라고 하는 말에 위안받고 웃으며 갔습니다.
그러나 아래 남자는 욕만 먹고 갔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래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왔고 위 청년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은 알 수 없어서 해답을 들으려고 온 사람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상담하다 보면 많은 경우 자신의 옳음만 어필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해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싶어 합니다.
은총을 주려는 이 앞에서 자기를 긍정하면 은총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말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순종과 함께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버리라는 말과 단어가 다릅니다.
나를 부정해야 주님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나를 긍정하는 이에게는 성령께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총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자기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인만 섬길 수 있고 그래서 하나의 ‘나’만 긍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긍정하려는 이들은 성당에 나와도 은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긍정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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