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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17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3-12-17 조회수 : 616

 [대림 제3주일] 
 
복음: 요한 1,6-8.19-28: 요한 세례자의 증언과 기쁨 
 
오늘 주제는 기쁨이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비록 자기는 무대 뒤로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쏠리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기쁨이 충만해진다. 기쁨의 동기는 구원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둠의 세력에 질식되고 있는 이 세상에 확신에 찬 모습으로 기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요한의 역할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를 증언해 주었듯이 성탄을 앞둔 우리에게도 그분을 증언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만일 깨어있지 못하고 그분의 신비를 볼 수 없다면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26절) 라는 말을 우리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성탄 성가를 부르고 끊임없이 말구유를 경배한다고 하더라도 깨어있지 못하여 신선하고도 밝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도 다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서 계신 주님을 뵙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요한의 증언은 신앙과 전례에서 계속된다. 그의 증언은 우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6절)으로서 예언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이며, 또한 그는 빛이나 메시아가 아니라, 그 빛을 증언한다. 증언이라는 의미는 직접적인 인식과 체험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짐(1요한 1,1 참조)을 전제하므로 역사적이다. 그분은 내면으로부터 파악되지 않으면 절대 인식되지 않는 분이다. 그러기에 증언이라는 것은 항상 상충적인 판단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즉, 진실과 거짓,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옳음을 가리는 심판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 
 
요한에게 그의 정체를 묻는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심문이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아요? 그 예언자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1-22절). 그러한 자세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앞으로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요한의 태도는 진실하고도 진리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는 엘리야도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도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예언자로서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23절) 한다.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 희망과 구원, 그리고 회개의 소식을 전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가리키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25절) 라는 질문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26-27절). 
 
요한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안목으로는 알아 뵙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그분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면서 청중들에게 그분께 대한 갈망을 일으키도록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자리를 마련해드리고자 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의 신비 앞에 요한은 위대한 교육자이다. 이사야는 한 신비스러운 인물이 올 것과 그의 사명을 예고하는데 특별히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압박받는 이들을 돌보아줄 것이라고 한다(이사 61,1-2). 예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 구절을 읽고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그분이 이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믿지 않고 죽이려 했다(루카 4,28-30 참조).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단 기준에 따라 해석하여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오히려 예수께 자신을 따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분이며,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고,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포로들과 옥에 갇힌 이들을 해방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어 주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얼마나 많은 찢긴 마음들이 이 세상에, 보잘것없다고 하는 사람들과 뛰어나다는 이들 사이에, 무죄한 사람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가난한 이들과 너무 많은 재물로 질식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예수님은 오셨다. 그리고 성탄 때마다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누구든지 필요로 하는 정신과 육체의 해방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 오심을, 우리에게 베푸실 이 해방의 은총은 이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져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참된 기쁨의 소식이었고, 나에게 혁명적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혁명적인 것으로 그 마음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쁨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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