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민속학자가 남아메리카 한 마을의 부족 아이들을 불러 모은 뒤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나무 옆에 탐스러운 과일과 맛있는 과자 바구니를 두었으니 먼저 뛰어간 아이에게 그 바구니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모두 출발점에 섰고, 민속학자는 출발 신호를 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누구하나 빨리 달리지 않고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구니 앞에 도착하자 모두 둘러 앉아 나누어 먹었습니다.
민속학자는 “누구든지 먼저 간 사람에게 바구니를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달려갔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도나도 “우분투”라는 단어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 뜻을 몰라서 당황하는데, 한 아이가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혼자만 행복해질 수 있나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분투’라는 아메리카 말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남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윤리 의식이었습니다. 이 ‘우분투’가 지금에도 울려 퍼져야 하지 않을까요? 혼자 살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무관심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분투’ 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우분투’ 정신이 가득하면 편안할까요? 편안하지 않을까요? 이 정신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편안해질 것입니다. 또한 삶이 어렵고 힘들다면서 너무 무겁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기쁘고 행복하다면 가벼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께 오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행복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아마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렵고 힘든 것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편함과 가벼움을 줄 수 있는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우분투’ 정신으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은 절대로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하나 되는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밤중에 시골길을 전조등도 켜지 않고 달리면서 뒷 창문으로 밖을 보려는 것이나 다름없다(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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