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부님께서 쓰신 책에서 동창 신부님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동창 신부님께서는 아주 젊은 나이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판정을 받고 큰 충격을 입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고 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가! 앞으로 할 일이 창창한데!”
이런 말을 자주 내뱉으면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힘든 투병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계룡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자칭 도사를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어떤 말기 암도 완치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으신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곳에 몇 달 머물면서 암이 더 심해져서 다시 치료받던 병원으로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도사는 죽음의 문턱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사람을 현혹하여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무모한 집착으로 무속인에 빠진 것을 자책하고 후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절박함에서 우리는 판단력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잊는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만을 사랑하겠다면서 사제가 된 분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요. 그렇게 우리 인간은 모두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참된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절박한 순간이 참 많으셨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도 그러했습니다. 당시에 처녀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아기를 가졌다고 하면, 약혼자였던 요셉은 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 절박한 순간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시기에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런 상황이라면 주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저 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내일 다시 찾아오세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아셨던 성모님이셨지요.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절박할 수 있는 순간을 은총의 순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모님과 같은 믿음을 갖추고 있을까요? 절박함이 또 하나의 희망이 순간일 수 있음을 믿음을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 닮게 만들어주는 행위입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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