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철학자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의 시조라 불리는 탈레스(BC 624-546)의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물웅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밤길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에 골몰하다가 그리된 것이었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하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이치는 알려고 하면서 바로 눈앞의 웅덩이는 보지 못하는군요.”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 모습도 반성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보지 않고 뜬구름 잡기식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전혀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에 합격할 수 없습니다. 전혀 일하지 않으면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 뜻에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사람이 과연 구원은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가능하기도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뜻을 바라보며 지금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어떤 시련과 고통의 걸림돌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언제나 굳건하게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눈앞의 웅덩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지금을 충실히 살 수 있는 모습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지금을 사는 그 충실한 모습이 하늘 나라라는 최고의 선물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진짜로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안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사람은 박해가 닥치거나 어려움이 오더라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어떤 실천도 하지 않은 사람은 박해가 닥치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얼른 주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집니다.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가 우리 삶의 행복을 좌우한다(로버트 윌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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