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제 바로 위의 형님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얼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했습니다.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다른 모습도 닮아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형님처럼 공부도 잘하고, 악기도 잘 다루고, 또 각종 능력도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외모 외에는 닮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형님과 저는 네 살 차이가 납니다. 어렸을 때의 네 살 차이는 능력과 재주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 차이로 어렸을 때 열등감이 생겼고, 소심해졌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에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아닌 각자 다른 역할을 주신 것입니다. 서로 다르게 태어났으므로 우리 각자는 고유한 천직과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찾지 못할 때, 그리고 남처럼만 되려고 할 때 자기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함은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은 공동체 일부가 되어 전체를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르게 만드신 하느님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나를 다르게 만드셨을까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묵상 안에서 ‘나’ 같이 사는 자기 존재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나’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보답을 바라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에 보답해 주십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참사랑을 베푸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시지요.
거저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합니다. 주는 사랑이 아닌 받는 사랑에만 더 큰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받을 것만을 생각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왜 나는 남들처럼 능력과 재주가 부족하고,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냐고 불평합니다. 그 ‘남’이 ‘나’가 될 수 없음에도 ‘남’이 되려고만 생각하면서 행복의 주인공이 아닌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우리 각자는 다양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양함은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써야 했습니다. ‘나’답게 살아갈 때,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얼마나 기쁨 속에 살 수 있는 곳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약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분 아드님의 모상이 될 실질적 역량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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