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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11-04 조회수 : 664

복음: 루카 14,1.7-11 
 
주위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집중하였고 그들은 과거의 율법 조항에 집중하였습니다.
사람이 꼰대가 되는 이유는 현재와 이웃사랑의 가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받거든 항상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과거와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교만’이 사람을 꼰대로 만든다는 것을 알려주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이웃사랑에만 집중하려면 나 자신만 생각하는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해지려 해도 잘 안 됩니다.
어느 순간엔가 윗자리를 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겸손이 힘들까요?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 더 행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겸손은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아니면 겸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조금씩 겸손하여지라고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의 가치를 오히려 교만으로 여겨 그냥 무시하고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불자들을 부를 때 ‘보살님’이라고 부릅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구도자를 말합니다.
보살은 어찌 보면 부처가 되기 직전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불자들을 들어 높이며 자신들이 먼저 합장하고 불자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로 치면 신자들을 거의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스님들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아서 자신을 보살이라고 믿게 되면 교만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을 보살이라 불러주지 않으면 스스로 그렇게 불림을 받으려고 명성을 구걸하게 됩니다.
그 비굴함이 나중에 스스로 자신을 부처로 만들려는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보살 대접을 받으면 오히려 합당하지 않다고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고 더 보살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신자들을 부를 때 ‘성도님’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성불이나 같은 뜻입니다.
불교에서 부처가 되면 성불한 것이고 개신교에서 그리스도가 되면 성도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성인입니다.  
 
신자를 부를 때 이미 ‘성인’이라고 여기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신교 목사님들은 교회를 ‘섬긴다’라고 말합니다.
성인들을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자신을 성인으로 섬겨준다고 교만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아무도 성인으로 여겨주지 않을 때 그 사람 스스로 그렇게 여겨달라고 거룩한 척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남이 보지 않을 때는 모든 죄를 짓고도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물론 천주교도 이 모든 의미를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왠지 신자들을 부를 때는 그저 ‘신자’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믿는 자’라는 뜻입니다.  
 
믿으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런 의미로 쓰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그 앞에 ‘평’자를 붙이며, 스스로 비하하듯이 ‘병신도’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어떤 평신도분이 사제들 앞에서 강의하실 때, 당신들은 사제들과 비교하면 아는 것도 없고 믿음도 부족하니 ‘병신도’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분의 말에서 평신도라는 말이 성직자들이 신자들과의 구분을 두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라는 비판이 담겨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사제들이 신자들을 평신도라고 부를 때 신자들은 겸손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뭐가 잘나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제들 앞에서 자신들도 사제들과 같이, 혹은 더 나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스스로는 평신도라고 말하며 성직자들과 차이가 난다고 여기는 것이 교만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런 비굴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겸손은 당당함과 함께 가고 교만은 비굴함과 단짝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겸손해지고 당당해집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제가 우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하느님으로 불려도 된다고 말하면 교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해도 되고, 또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성체를 하느님이라고 해도 된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왜 우리는 하느님이라 하면 안 될까요?  
 
겸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당당함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비굴하게 ‘그저 나는 조금 믿는 신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그것 이상은 살고 있어서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이웃을 높여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살이요 성도를 넘어서 이미 부처가 되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온종일 내가 예수님이라 믿고 살아보십시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나 자신을 미리 낮추는 비굴함은 오히려 교만으로 표현됩니다.  
 
가난하기만 해서 부자들에게 비굴하게 돈을 구걸하던 사람이 복권이 당첨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비굴해지기를 바랄 것이고 그래서 교만하게 첫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겸손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그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웃을 하느님처럼 부를 수는 없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나 성체처럼 여겨주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이 겸손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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