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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9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10-29 조회수 : 576

복음: 마태 22,34-40: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오늘의 전례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강조하며,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증거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두 실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악의를 위장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라고 예수님을 떠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신명기 표현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그리고는 봉인하듯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하셨다. 
 
이러한 사랑은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님 자신의 생활,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필립 2,8 참조)으로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된다. 그러나 예수님 대답의 의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우선성에 대한 재확인보다도 그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놓으려는 데 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예수께서는 레위 19,18을 상기시키며 이는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체계를 확인하면서도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려 하신다. 두 계명 간의 보충적인 것에 대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 창조되었으며, 인간 창조가 가장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창세 1,31). 둘째로, 강생의 신비 이후 하느님의 모습이 더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이제 신화(神化: Deificatio)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하느님께 드리는 그 사랑과 닮은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바로 형제들과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도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라고 역설하고 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40절) 는 말씀은 두 계명의 일치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뿐 아니라, 이 두 계명으로 모든 계시가 종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종합의 의무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종합을 생기 있고 활력 있게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더욱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 즉 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사랑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웃 사랑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이었다. 탈출기에 나오는 규정들은(22,20-26) 박애주의적 정신만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움에 있는 자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비하시기”(탈출 22,26) 때문이다.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그것은 하느님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다(마태 25장 참조). 하느님은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다루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과 만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 중심주의적인 박애주의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이웃 형제들에게 베풀 수 있는 봉사도 더 잘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이 두 계명의 종합을 이루어가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37.39절). 이제 우리는 모두 가치관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첫 자리에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 자리에 다른 것이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물이나, 다른 것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될 때 우리는 진정 이 두 계명을 종합해 나갈 수 있다. 이 종합을 위해 조금씩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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