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6장 12-19절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우리 모두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을>
누군가가 한 단체나 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인선’입니다.
새로운 리더가 구상하는 바에 따라 대규모 인사이동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대대적 물갈이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대체로 요직에는 어떤 사람들을 뽑습니까?
그간 리더 편에 서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 능력이나 경력이 출중해서 잘 보좌해줄 사람, 필요한 분야에 통달한 전문가, 결국 학력이나 가문, 배경을 고려해서 최종적인 낙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인선은 세상의 방식과는 철저하게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뽑기 전에 홀로 산으로 들어가셔서 밤새워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인선에 엄청난 정성과 공을 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딱’ 열어봤더니, 세상 사람들의 인선 기준과는 너무나 달라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제자단에 뽑힌 사람들의 면면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니
학력이나 능력, 가문은 거의 고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물들 안에는 ‘어떻게 저런 사람을???’하고 의문을 품을 정도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인선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세상적인 잣대와는 철저하게도 다르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똑똑함’, ‘있어 보임’, ‘대단함’ ‘출중한 능력’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다른 무엇에 앞서 무상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현이 바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은 어떤 사람이 받는 걸까요?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에로 초대된 것만 해도 과분한데 우리는 한 번 더 그리스도인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 위에 각자의 처지에 따른 부르심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농부로, 회사원으로, 가정주부로, 기술자로, 교사로, 사제로, 성직자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에 따르면 여러 다른 종류의 과일 나무들이 각각 다른 열매를 맺는 것처럼 교회 내 각 구성원들은 각자 주어진 신분과 처지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신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교가 관상수도회 수도자처럼 하루 온 종일 경당 안에서 기도에만 전념한다면 그가 맡고 있는 양떼들은 누가 돌보겠습니까?
가정을 가진 주부가 카푸친회 수도자처럼 금전을 소홀히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는 신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자에게 적합한 신심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신심생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심생활이 군인들의 내무반이나 근로자들의 작업장, 제왕들의 왕궁, 결혼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정 안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의 교설입니다.
구약시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사라 레베카 같은 인물들 보십시오.
거친 세상의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거룩한 신심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성녀 안나, 마르타, 모니카 같은 성녀들을 보십시오.
그녀들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거룩하였고.
성 고르넬리오, 세바스티아노는 군인이자 대단한 신심가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처지나 환경 속에서 살아가든지 부르심에 합당한 신심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을 실천해야 하며, 거룩함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