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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10-27 조회수 : 732

루카 12,54-59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연의 법칙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잘도 이용합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비가 오겠다고 생각하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됩니다.  
 
자연에 법칙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만들어지지 않으면 법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모든 법칙은 무언가를 만들 때 만들려는 사람에 의해 미리 계산된 설계도와 같은 것입니다. 하다못해 작은 의자를 만들려고 하더라도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설계도가 있다는 말은 그 법칙대로 만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의자에서 한 다리만 짧아도 그 의자는 쓸모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연도 만들어졌고 법칙이 있고 그 법칙대로 살아야 온전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도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법칙은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며 멀씀하시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며 이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고소하는 자에 의해 고소당해 재판관에게 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피고로서 그 고발한 자와 합의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재판관은 빌린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그를 가둘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화해하고 재판관 앞에 나아와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심판관이신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도 우리 설계도가 들어있으니 분명 우리를 만든 분이 계실 것이고 그 설계도대로 살았는지 심판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영화 ‘할로우 맨’(Hollow Man)은 ‘인간에게 투명하게 되는 능력이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
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케인 박사는 미국 정부를 위해 투명 혈청 개발을 위한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해 고릴라 실험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고 보고합니다.
자기가 직접 투명해졌다가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투명해지자 그는 조금씩 욕망에 집착하게 됩니다.
투명하지 못했기에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투명한 것만으로는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되자 그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 사람들을 제거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버립니다.  
 
케인은 자신이 투명하다는 비밀을 아는 사람들을 제거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로부터 당하고 맙니다. 불속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이 우리 마지막 심판 때도 일어날 일입니다.
케인은 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없었을까요? 본인이 투명하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기 행동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때 우리를 고발할 대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고발하는 자는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설계도대로 살아가는지 심판하는
측정기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병이 들어도 아프지 않은 상태와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나병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몸이 허물어지고 죽게 됩니다.
양심은 우리 영혼이 나병을 입지 않도록 마련해놓으신 측정 도구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면 누구나 부끄러워 자기가 한 일을 숨기려 합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을 더 비판하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가책을 잊기 위해 더 술에 취하거나 쾌락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힘으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을 제거하려 하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부끄러운 부분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서로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양심의 가책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망가져 하늘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을 잃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양심의 가책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 솔직히 죄를 고백하고 그분이 마련하신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만큼 깨끗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 안에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며 우리 안에 계신 그분 덕택으로 우리를 받아주십사 주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없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힘들다면 적어도 고해성사 때 사제에게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죽옷을 입습니다.
먼저 양심과 화해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고해성사라는 양심과 화해하는 축복의 성사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마지막 때에 나무가 자기에게 쓸모가 없는 썩은 나뭇가지들처럼 주님께서 떨어내시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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