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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10-25 조회수 : 683

루카 12,39-48 
 
나는 몇 명의 영혼을 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가? 
 
 
샤를로트 퍼킨스 길먼의 『누런벽지』 (The Yellow Wallpaper)는 19세기 후반의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및 사회적 억압에 관한 내용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의사인 남편 존, 그리고 그들의 아기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대형 저택을 임대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술자는 최근에 아기를 출산한 후 임신성 우울증 또는 신경 쇠약과 같은 조건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존은 아내를 일시적인 신경성 장애로 진단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휴식을 취하고,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와 같은 활동을 피하도록 권장합니다.  
 
이들은 저택의 최상층 침실에 머물게 되는데, 이 방에는 누런색의 이상한 벽지가 붙어 있습니다.
서술자는 처음에는 그 벽지를 싫어하지만, 점차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권장에 따라 아무 활동도 하지 않게 된 서술자는 점차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집니다.
그녀는 벽지 뒤에 여성이 갇혀 있다고 믿게 되며, 이 여성이 밤마다 벽지를 긁으려고 시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서술자가 점점 더 광기에 빠져들면서, 그녀가 벽지를 완전히 찢어버리고, 그녀 자신이 그 벽지 뒤의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 소설은 여성이 아픈 이유는 남성처럼 공부하고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여성은 본래 약한 존재라는 선입견에 맞서는 최초의 페미니즘적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길먼은 그렇게 벽지에 갇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먼의 아버지는 독실한 종교인이었지만, 가족을 책임지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홀어머니와 어려움 속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결혼한 남편도 결국 길먼의 신경 쇠약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녀는 휴양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를 깨고 소설을 씁니다.
여성도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미국에 퍼져있던 무거운 분위기와 홀로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휴양을 마치고 나와 남편과 이혼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미국 여성주의자, 소설가, 시인, 강사로, 여성의 권리,
사회 개혁, 그리고 여성의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더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산길을 간다고 생각해도 이미 나 있는 길과 내가 헤치고 가는 길은 상당한 어려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더 큰 보람으로 남을까요? 어려운 길로 나아가 길을 낸 사람일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결국 행복한 결과를 주는 일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일보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음에 당신의 제자들과 일반 신자들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는 더 큰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부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조금은 편한 수녀의 생활을 접고 더 힘든 길을 택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고 온 나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평생 부담감으로 살아온 축구선수 메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많이 맡기신다는 말은 그만큼 인정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인정받으면 그만큼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내가 누구이냐에 대한 나의 믿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능력과 일, 성과가 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의사가 되었는데 진료를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의사가 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만한 일을 해야 그만한 보람이 옵니다.
그 보람은 바로 내가 믿는 그 사람이 되었다는 자존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행복을 얻으려면 그만큼 많이 일해야 합니다.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하려는 꿈을 꾸고 있나요?
‘나는 가족도 구하지 못하는데 뭔 큰일을 하겠느냐?’라고 생각하나요?
그러면 나 자신을 벽 속에 가두는 것이 됩니다. 누런벽지의 길먼처럼 벽지를 뚫고 갇혀 있는 나를
꺼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을 때 나에겐 더 많은 고난의 십자가가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때 느끼셨던 그 기쁨과 더 가까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그 행실대로 갚아주십니다. 
 
마더 데레사는 천국의 문 앞에 있던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이 천국을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채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차이가 나의 자존감, 곧 행복의 수준을 만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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