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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10-19 조회수 : 693

루카 11,47-54 
 
지식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갇히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상 지식의 흐름을 막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식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모이면 그 모임 안에는 그 모임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그 공동체에 흐르는 지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지식은 공동체에 담기고 그 공동체에 속하면 그 지식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라며 각자의 지식대로 분열되는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하나이고 그 교회만이 “진리의 기둥”입니다.  
 
류시화의 『인생 우화』는 폴란드의 ‘바보들의 마을, 헤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화로 엮은 책입니다.
우화의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는데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에 「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근처의 상업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마을 의회 대표 베렉이 그 도시 시청 벽에 걸린 해시계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 시간의 기준이 될 해시계가 없어서 각자 조금씩 차이가 나는 시계들을 맞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만들어 마을 중앙 광장에 설치하기로 결의합니다. 
 
해시계가 완성되었을 때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과 재정을 들여 만든 해시계가 진흙 웅덩이 속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또 해시계는 이미 그 마을의 자랑이 되었기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해시계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헤움 사람들은 다시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어떻게 보호하면 좋을지 상의하였습니다.
그들은 해시계 옆에 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게 하고 지붕을 씌워 비를 맞지 않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또 막대한 재정을 들여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운 해시계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어떤 도시에도 없는 해시계 박물관을 보며 내심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해시계는 지식의 총체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한 공동체 안에 갇히면 어떻게 될까요?
쓸모없게 됩니다.
해시계는 해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교만하여 항상 그 지식에 담을 쌓고 지붕이 되려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게 하려면 담과 지붕을 헐어내어 하늘의 빛을 받게 해야 합니다.  
 
저는 논문을 발타살의 교회론에 관해 썼습니다. 처음 논문 제목은 “발타살 신학 안에서의 마리아-교회, 그리스도의 신부”였습니다.
폰 발타살은 교황청 교회 일치성 장관이었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현대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논문을 다 읽으신 지도 신부님은 “발타살 신학과 마리아-교회, 그리스도의 신부”로 바꾸어 책을 내주셨습니다. 
 
발타살 신학 안에 저의 논문 내용이 머물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타살 신학 안에서의”가 아니라 “발타살 신학과”로 바꾸어 저의 생각과 바타살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삼위일체 신학이 발타살과 다릅니다. 
 
발타살은 삼위일체를 남자와 여자로 볼 때 성령을 그 자녀로 보았지만, 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선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들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성령께서 그 관계 안에 들어가 있으셔야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성립된 후에 태어나는 자녀가 성령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저는 논문을 쓰면서도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고 하여도 그 안에 사로잡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참 스승은 예수님이시고 그 지식을 지닌 공동체는 상지의 옥좌이신 성모님으로 하는 가톨릭교회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학파에 속하면 분명 완전한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자세를 취할 때 “네가 발타살과 그의 학파 박사 신학자들보다 더 공부를 많이 했고
똑똑하다는 말이냐?”라며 교만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진정한 스승은 그리스도, 마리아, 가톨릭교회뿐입니다.  
 
저는 최대한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지식을 “직접”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거쳐서 오는 지식은 오염되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성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입니다. 이것의 진위는 우리가 판단할 능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금서로 지정했다가 결국엔 신자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출판을 허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볼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눈은 우리가 어떤 특정 학파나 집단에 속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가려집니다.
사람을 따르지 맙시다. 
 
요한 사도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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