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8,19-21
우유부단함 해결법; 고슴도치로 살 것인가, 여우로 살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지만,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정말 많은 반론이 나올 수 있겠지만,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이가 없기에 성모님은 기분 나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지극히 단순한 사고를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아버지의 뜻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결정도 쉽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한 어머니가 “밥 먹어라!” 하고 불렀는데 뛰어가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만이 그 어머니의 자녀들입니다. 이렇듯 부모의 뜻은 자녀들을 구별하는데 핵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은혜를 받았기에 부모의 뜻을 따르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형제로 보아야지, 육체적 형제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죽음과 함께 영원히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너무나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오늘 예수님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냐, 가족이냐의 문제로 갈등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호합니다.
그분은 아버지 뜻, 한 가지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내 뜻에 치우치면 우유부단해지고 그러다 잘못된 선택을 하여 평생 후회하게도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하나만 하면 됩니다.
영화 ‘레이버 데이’(노동절)은 한 10대 아이가 새롭게 결합한 부모의 뜻에 어떻게 적응해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야기는 1980년대 후반 노동절 주말 동안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엄마 아델은 10대 아들 헨리와 함께 살고 있는 우울한 미혼모입니다.
그녀는 헨리를 낳고는 네 번이나 연속으로 유산하며 극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남편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델과 헨리가 쇼핑하던 중, 피를 흘리고 있는 프랭크라는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옵니다.
프랭크는 탈출한 죄수로서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도록 설득합니다.
아델은 두려움 때문에 동의합니다.
프랭크는 아내와 자기 아기를 죽인 살인자처럼 보이지 않게 매우 부드럽고 섬세합니다.
사실 프랭크의 아내는 바람을 피우며 남편을 조롱하고 있었고 부부싸움 중에 사고로 아내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아기는 욕조에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부부싸움 하다가 배우자와 자녀를 죽인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 주변을 수리하고, 헨리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조금 있으면 상하게 될 복숭아들을 이용해 파이를 만들어줍니다. 프랭크는 지명수배된 상태였기 때문에 두 모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델이 헨리를 막습니다.
헨리도 프랭크가 싫지 않습니다.
하지만 프랭크가 엄마와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자신은 점점 소외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프랭크는 둘을 데리고 캐나다로 도망을 치자고 합니다.
그러면 헨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와 헤어져야 합니다.
헨리는 갈등합니다. 돈을 챙기고 소지품을 챙기는 상황에서 프랭크는 이혼한 아빠, 경찰관과 은행, 여자친구와 동네 주민들에게 자기 집에 탈옥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와 프랭크가 사랑하는 것을 갈라놓을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떠나려는 찰나 옆집의 신고를 받고 경찰들이 들이닥칩니다.
프랭크는 아델과 헨리를 묶어놓습니다. 인질로 해야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5일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하며 잡혀갑니다.
시간은 흘러 헨리는 여자친구와 결혼도 하고 프랭크가 알려준 방식으로 복숭아 파이를 만들어
유명한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잡지에서 본 프랭크는 헨리에게 편지를 쓰고 엄마를 만나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헨리는 엄마가 같은 곳에 살고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편지를 써 줍니다.
25년이 지나 프랭크는 아델을 찾아옵니다.
헨리는 더는 엄마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함께 마지막을 걸어갈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헨리가 자신을 생각할 때는 우울증 엄마와 범죄자 새 아빠의 결합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에 순종할 때 둘은 결합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부모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순종하는 게 전부입니다.
그 사랑은 나를 버리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사랑의 법에 모든 이의 뜻이 될 때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우리는 가끔 선택 장애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고민한다고
해 봅시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아무거나 동전 뒤집기 해서 시킵니다.
결국 선택 장애가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짜장면을 먹으며 ‘차라리 짬뽕시키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고 고민합니다.
결정 장애나 충동적 결정은 같은 데서 나옵니다. 다 자기의 뜻을 지나치게 따르기 때문입니다.
두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데 있고 그다음은 욕심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이들은 내 선택이 틀려서 내 자존감이 상처 입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결정을 두려워하다 시간이 촉박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것을 선택해서 잃게 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저하다가 다 잃게 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가 ‘나’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한 유일한 해결법은 ‘순종’입니다.
그리스 격언에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알고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고슴도치를 잡아먹기 위해 많은 수를 고안해냅니다.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봅니다.
고슴도치는 여우가 다가오면 귀찮아하면서도 한 가지만 합니다.
몸을 공처럼 둥그렇게 웅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우는 가시에 찔려 다른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일단 후퇴를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미사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지,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든지, 선행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여우가 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나만 생각하는 고슴도치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만 물으면 그만입니다.
그 뜻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만 생각하는 고슴도치가 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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