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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4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9-24 조회수 : 434

복음: 마태 20,1-16: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고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는 은총은 그분의 사랑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가치판단과 행동이 완전히 다른 분이심을 전해주고 있다. 주인은 이른 아침, 그리고 아홉 시에 일꾼을 구하고 그들에게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였다. 그리고는 정오와 오후 세 시쯤에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그와 같이하고 있다(1-7절). 이렇게 온종일 일꾼을 부른 것은 일이 급해서였겠지만, 일하는 시간은 완전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막판에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12절) 사람도 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주인은 관리인을 시켜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한 데나리온씩 주게 한다. 그래서 온종일 일한 사람들은 계약한 것보다 더 받으리라 기대를 하지만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되어 실망함과 동시에 불평을 털어놓는다(8-12절). 그러나 주인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 불평을 일축한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3.15절). 주인의 행동은 계약상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 주인의 선한 마음은 더 많이 일한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의 선성이 차별을 초래한다면 그것 역시 불의의 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주인의 의로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행위는 우리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고 완전히 무상적이며 모든 장벽을 없애시고 요구보다는 항상 무엇인가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온종일 일한 사람들도 사실은 주인의 초대에 의한 것이며, 그들이 더 많이 일했다면 그 자체가 은총이며 자비 때문이기에 그 원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배척받고 소외당했던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다. 반면에 사회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제쳐놓으신 것 같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그리하여 어느 때라도 모든 사람이 당신의 포도원에 들어오도록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당신 자신을 변호하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 때문에, 먼저 온 사람들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그들의 특권의식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되찾은 작은 아들에게 큰 배려를 하지만, 이 때문에 큰아들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간에 온 사람들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며, 무엇인가 더 보상을 받고자 하는 먼저 온 사람들은 유다인들을 말한다. 하느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그분 앞에서 특권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마지막 자리에 두실 것이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16절). 어떤 면에서는 유다인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이다.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나 공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중요한 것은 일이나 봉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과 신뢰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수고에 대한 어떤 보상을 요구하는 처지에 있게 된다면, 우리는 자녀가 아니라, 고용된 일꾼의 신분이 되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의 멍에를 지고 만다. 

 

사도 바오로도 자신의 영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의 포도원에 늦게 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구원이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로마 9,16)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를 사도로 불러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될 때, 즉 주님의 사랑에 완전히 잠길 수 있을 때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바오로는 여기서 더 형제들에게 더 유익한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는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무상적 사랑이 바오로 사도에게 형제들을 위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치도록 강력히 부추기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사람들도 특별한 상급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주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상급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자녀의 삶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보상이나 특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형제들을 위해 살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기도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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