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일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냥 모든 사람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까요? 분명히 잘못되었고 또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단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으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특정한 윤리적 행위를 분석하고 그 행위가 객관적인 윤리 규범과 부합하는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관한 판단은 멈추고, 그 사람의 행위에 관한 판단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 또는 저런 행위는 죄가 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는 사람 자체에 관한 판단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지 사람을 판단할 권한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며 사랑으로 함께해주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너무나 엄격한 잣대를 세우면서 행위가 아닌 사람 자체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자신도 늘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서 용서의 끝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죄인에게도 언제가 공동체의 문을 열어 두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 자체만을 바라보면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으며 지적합니다.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만 탈렌트 빚진 사람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 탈렌트는 당시 노동자의 6,000일 일당에 해당한다고 하지요. 15년 이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아야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만 배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빚을 임금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울까요? 하지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과장된 금액인 만 탈렌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용서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본받지 않는 매정한 종의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외치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사람에 관한 판단 자체를 멈추고,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용서 안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순간, 내가 가진 것을 절실히 부러워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라(푸블릴리우스 시루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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