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빠진 희생은 오염된 피만 배출한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구약에서 십자가의 상징은 물론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매달기 위해 만든 장대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들은 구리뱀을 보면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리뱀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보면 낫게 된다는 뜻일까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도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낫게 하려고 나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닮을 수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맙니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누군가의 죄를 씻어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고가 누군가의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가 되려면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디디 블랜차드와 집시 로즈 블랜차드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엄마 디디는 딸 집시를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백혈병, 근이영양증, 정신 장애 등 다양한 건강 문제와 장애가 있다고 믿도록 속였습니다.
디디는 딸의 질병과 장애를 홍보하여 기부, 여행 및 기타 혜택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에 버티다 못한 집시는 온라인에서 만난 남자친구 니콜라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살해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상황은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렀습니다.
집시는 어머니의 속임수와 자신이 겪었던 학대의 정도를 깨닫게 되었고, 어머니를 죽이는 것만이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디디는 집시를 키우기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집시를 자신의 십자가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피 흘림은 깨끗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기의 의지로 피를 흘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에서는 리사 헤이든과 존슨의 사례가 있습니다.
리사도 존슨이 음식 알레르기, 뇌성마비, 낭포성 섬유증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헤이든은 자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부터 수년에 걸쳐 약 325번의 불필요한 치료와 시술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의료 전문가들을 속여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믿게 했고, 이에 따라 영양 공급 튜브 장착을 포함한 일련의 불필요한 개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아들을 대신하여 수많은 상과 선물, 재정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왕족과 다른 고위 인사들을 만났고, 기부금으로 휠체어 이용 가능 차량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초콜릿 바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보건 방문자가 알아차리면서
이러한 속임수가 드러났습니다.
이 관찰에 따라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리사는 다른 많은 형태의 의학적 학대와 속임수 중에서도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 공급 튜브를 통해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그녀는 집에서 의료기기를 조작해 결과를 위조하고 의사들에게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설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와 의료인의 동정과 지원을 가장하여 아동에게 가할 수 있는 심각한 학대의 극명한 예입니다.
디디나 리사 모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 흘림은 오히려 아이들을 안 좋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씻어줄 수 없는 더러운 피였습니다.
그 이유는 엄마들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지심의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흘리는 피가 아니면 자녀를 위해 흘리는 어머니의 피는 오염됩니다.
자아가 죽어서 흘리는 피가 아니라 자아가 커지기 위해 나를 고생시켜 흘리는 피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창은 오로지 ‘순종’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잘 키워낸 부모는 분명 소명을 가지고 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피 만이 자녀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해 봅시다. 많은 군인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라이언에게 가치 있게 살라며 죽어갑니다.
라이언은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평생 열심히 삽니다.
만약 그들이 나라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라이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피가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나의 피는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 순종하여 내어주는 피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스스로 흘리는 피가 됩니다. 사실 그것은 자아의 피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뱀이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가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흘리는 피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합니다.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흘리는 피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피 흘림은 누군가의 죄를 사해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여 흘리는 피만이 깨끗하여 그 사람의 죄를 씻어줄 수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사제도 주님께서 파견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피조물의 한계상 온전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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