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6,1-5
뻐꾸기를 키우는 새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보고는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물음은 곧 ‘구원’에 관한 물음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간의 일을 마치시고
7일째 쉬신 시간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이렛날 쉽니다.
우리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나에게 영혼을 구원하라고 일을 시키신 분 안에서 쉬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영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당신의 일을 하는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의 집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 자기 뜻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그분께 순종하는 새로운 아담들입니다.
영화 ‘비바리움’(2019)은 인간이 왜 고생은 하는데 안식이 있을 수 없는지를 고찰하는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함께 첫 집을 구입하려는 젊은 부부인 젬마와 톰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 초반부에 뻐꾸기 새끼와 그가 밀쳐내 떨어져 죽은 다른 새들의 새끼들이 나옵니다.
한 아이가 왜 뻐꾸기는 자기 집을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젬마는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떨어진 두 마리의 새끼를 묻어줍니다. 어미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뻐꾸기 새끼에게 음식을 물어주며 지쳐갑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법칙에 사로잡히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젬마와 톰은 부동산 중개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조금 이상한 세일즈맨 마틴을 만납니다.
그는 욘더라는 새로운 개발 주택지를 보도록 초대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마틴은 사라집니다.
그들은 욘더를 떠나려고 할 때 어느 방향으로 운전해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항상 같은 집인 9번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그들은 연료가 떨어져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안에 아기가 들어 있는 상자와 “아이를 키우고 석방되라”라고 적힌 메모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곳에 갇혀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아이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98일째가 되면 아이는 아이보다 어른처럼 행동하고 소름 끼치고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톰과 젬마의 소리와 행동을 모방합니다.
톰은 땅이 가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앞마당을 파기 시작합니다.
젬마는 차에 들어가 지난날의 향수에 빠져듭니다. 결국 소년은 이상한 부동산 중개업자 마틴의
복제품으로 성장합니다.
톰은 땅을 파다 지쳐 죽고 맙니다.
아이는 톰을 비닐에 싸서 톰이 파 놓은 땅에 던져버립니다.
분노한 젬마는 소년을 죽이려 하지만 도리어 압도당하고 결국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소년은 역시 젬마도 구덩이에 던져 묻습니다. 이후 그는 여행 가방을 싸고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와 늙어 죽은 마틴의 이름표를 달고 미래의 톰과 젬마처럼 될 순진한 커플들을 맞이합니다.
‘비바리움’은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며 감시하고 실험하는 곳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희생합니다.
여기에서 뻐꾸기 새끼, 혹은 마틴이라는 톰과 젬마가 키운 아기는 자기 안의 자아입니다. 탈출기에서는 파라오가 될 것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것들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됩니다.
누구나 어떤 시스템이나 법에 지배받습니다.
내가 있는 욘더라는 곳은 내가 지배받는 자아의
시스템입니다.
결국 나는 새로운 법의 시스템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뻐꾸기 새끼에게 지배받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길은 뻐꾸기 시스템을 이길 수 있는 누군가에게 길러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길러진다면 자기 새들을 죽이는 뻐꾸기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집에 머물려면 인간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의 법을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뻐꾸기의 시스템을 벗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 뜻에 따라서 그분 집에 머물지 않으면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아의 시스템 안에서 안식을 찾으려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벌써 하느님의 집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뜻을 주님께 강요하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이라야 안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 자체가 나의 안식을 빼앗습니다.
마치 파라오처럼 나를 종살이시킵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이 그 뱀의 압제에서 나를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안식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뜻을 따르느냐가 어느 집에 머무느냐를 결정합니다.
어느 집이건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의 집에 살면서 안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따르는 법, 곧 욕구가 내가 사는 집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