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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6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9-06 조회수 : 418

루카  4,38-44 

 

붙잡는 우리, 떠나시는 주님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은 군중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고 가슴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발길이 닿는 곳 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왔고, 그분이 선포하시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에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라다니는 광경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군중의 환호와 박수갈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절대 한곳에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군중을 뒤로하고 또 다시 길을 떠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붙들려는 군중을 진정시킨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붙잡는 우리 인간, 그러나 길 떠나시는 주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뭐든 붙잡는데 이력이 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 대상이 재물이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상관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조차 꼭 붙들어 내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우리 인간의 모습 앞에 씁쓸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고, 꼭 붙들어 새장 안에 가두어놓으려는 시도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자녀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동물, 어떤 피조물이 자신의 새끼를 30년, 40년, 50년 동안 붙들고 있습니까?

사실 18년 세월이면 붙들어 놓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긴 세월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놓아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그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자녀들을 ‘어른 아이’로 전락할 때 까지 끝까지 붙들고 있는 부모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충분히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정권을 가질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진학할 대학교, 학과까지

부모가 나서서 다 결정해줍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군부대 앞까지 따라가서 눈물을 닭똥 같은 눈물을 철철 흘립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녀 직장 상사들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려 듭니다.

자녀 대신 사직서까지 대신 써줍니다.

더한 것은 그런 치맛바람을 보면서도 당연한 듯 바라보는 자녀들입니다. 

 

더 한 것은 이런 붙듬이 피조물을 넘어 하느님에게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어떤 것입니까?

그 어느 것에도, 그 어떤 혈연, 학연, 지연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무한히 크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크신 하느님, 바람처럼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으려 하니 그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으로 축소시켜 독차지하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나만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신 작은 하느님이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고을 나자렛,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인류 전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다가오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혹시라도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 내 틀 안의 하느님, 내 방식대로의 하느님으로 가둬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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