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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9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8-29 조회수 : 399

마르코 6,17-29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확신 속의 순교! 
 
 
하느님 움직임의 특징은 철저하게도 하향성(下向性) 그냥 계셔도 좋으련만, 굳이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셔서,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과 어울리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대체로 반대입니다. 철저하게도 상향성(上向性)입니다.
보란 듯이 한번 높이 높이 솟구쳐보고 싶은 욕구,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 주전선수가 되고 싶은 욕구,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구, 주역,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조역으로서의 삶, 조력자로서의 삶, 주변인으로서의 삶, 선구자로서의 삶, 예언자로서의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의미 있는지를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세례자 요한의 삶이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감독, 또는 작가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감독이나 작가가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 드러내는 것 보셨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무대의 한 가운데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렌즈의 초점이 맞춰지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이 확실히 뜨도록, 작품이 잘 나오도록, 무대 아래서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만, 작품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헌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일, 그리고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세례자 요한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이 조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구자로서 지녀야할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에 진지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부여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예언자치고 고통이나 십자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세상으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수시로 끔찍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흡사한 방법으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안정이나 평화라는 단어는 꽤 낯선 단어들이었습니다. 
 
왕의 치부를 신랄하게 지적한다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는 일이었습니다.
왕을 향해 쓴소리를 수시로 남발한다는 것은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도 예언자들은 흔들림 없이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한 참 평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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