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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8-26 조회수 : 472

에제키엘 43,1-7ㄷ
마태오 23,1-12 
 
걸리버 여행기와 겸손의 4단계 
 
 
사람 아이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늑대를 자기 아버지라 믿으면 그 아이는 본성이 사람일까요, 늑대일까요? 사람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늑대의 본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은 자기가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자신이 아버지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람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자신을 늑대라 믿으면 늑대처럼 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처럼 살며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처럼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친히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라고 하며,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가르칩니다.  
 
본성에의 참여가 자신이 아버지의 본성을 가졌음을 믿을 때 발휘된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며 그것은 교만이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아버지라 믿으라고 하신 오늘 복음은 겸손해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하면 과연 교만일까요, 겸손일까요?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라는 영국 의사가 4개의 서로 다른 세상을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를 풍자해 출판 즉시 금서로 지정된 풍자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4개의 섬을 여행하면서 바뀌는 주인공의 시각을 그렸습니다. 
저는 이것이 겸손의 단계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책의 순서대로 설명해 드릴 테니까 내가 걸리버라고 생각하고 언제가 가장 겸손한 때였는지 그 순서를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걸리버는 처음에 ‘소인국’에 표류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손가락만 합니다. 
걸리버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들 식량의 1000배가 넘는 음식을 먹으니 밥값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들의 배가 공격해오자 50척이 넘는 배를 줄로 엮어서 끌고 옵니다. 
그렇게 소인국의 영웅이 됩니다. 
사회를 위한 공헌자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표류지는 ‘거인국’입니다. 
그는 거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커스를 하며 지냅니다. 
주인의 배를 채워주어야 자신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한없이 작아집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공주를 위해 자신이 살던 나라는 비리와 폭력이 난무했다고 자아비판을 하며 그들을 높여줍니다. 
조금은 비굴하지만 그래도 이웃을 높이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표류지는 떠다니는 섬, ‘라퓨타’가 있는 곳입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섬에는 정치인과 학자들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은 굶어 죽고 있는데도 학문과 문화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걸리버는 그들에게 분개합니다. 
정치만 비판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섬은 거짓말을 모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말들이 사는 곳입니다. 
말들의 섬입니다. 
그런데 또한 야후라는 괴수들도 있습니다. 
야후들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짐승의 손과 발을 가졌습니다. 
너무 자기만 알아서 5마리에게 50인분의 음식을 주어도 그들은 서로 먹겠다고 싸우며 죽입니다. 
사랑 지극한 말들과 그 괴수들 앞에서 자신이 그 괴수 중 하나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말처럼 살려고 네 발로 걷고 말의 목소리도 흉내 냅니다. 
모습은 괴수지만 말들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자, 결정하셨습니까? 
우선 겸손과 가장 거리가 먼 섬은 어디일까요? 
걸리버가 겸손의 길을 시작하지 않았을 단계입니다. 
바로 세 번째 하늘을 나는 ‘라퓨타’섬입니다.  
 
걸리버는 정치인들은 비판하면서 자신은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정치인들 비판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방인들처럼 겸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소인국’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믿는 단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을 돕지만,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아 자신만 커집니다. 
겸손보다는 아직은 교만이 지배하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거인국’에 갔을 때입니다. 
이때는 이웃이 있으니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들어 높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겸손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자기는 작아지고 이웃은 크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성경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높여주려고는 하지만 예수님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만하다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져야지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아직 참 겸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단계의 겸손은 ‘천국 백성이 사는 섬’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하느님 자녀라 여기고 그렇게 거짓 없이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드님인 예수님의 삶과 비교할 때 자신은 괴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괴수 같은 사람들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하느님 자녀임을 알게 된다면 이 단계에 오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으면 자신을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되어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인간이라고만 믿었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어볼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이라 물 위를 걷는데,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에 빠졌다가 걸었다가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때 
가장 겸손해집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이것이 구원의 핵심교리입니다.  
 
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말이고, 
신성에 참여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이라 믿어야 인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이라 믿어야 신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여 신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는 마치 인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두 발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처지를 인식하는 아기처럼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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