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감도와 존경심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우리 교회를 바라보며...
세례자 요한과 배턴 터치를 하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후, 당신 사업에 함께 하실 동역자이자 제자 모집이 한창인 때였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아라.”며 당신 거처로 초대하신 데 이어,
오늘은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향해 “와서 보시오.”라고 초대합니다.
어제 두말없이 흔쾌히 초대에 응한 두 제자와 달리, 나타나엘은 반응이 꽤나 회의적이고 부정적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복음 1장 46절)
나자렛은 로마의 속주(屬州)였던 갈릴래아의 남부 지방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주변은 산이나 언덕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주요 도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당대 잘 나가던 도시 예루살렘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변방 중의 변방이었습니다.
정치나 경제, 학문이나 종교적 삶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이었기에, 나타나엘의 시큰둥한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무시’한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나타나엘의 태도는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자마자, 그간 품고 있었던 회의감은 기대감으로, 무시는 존경심으로, 냉랭함은 호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이거,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즉각적인 신앙고백을 하기에 도달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복음 1장 49절)
나타나엘 태도의 급반전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매력적이고 호감가는 존재였는지,
존재 자체로 얼마나 강렬한 카리스마와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분께서 발산하시는 강렬한 사랑의 빛을 인지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무릎을 꿇었으며, 그 자리에서의 회심과 사랑 고백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홀딱 반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목숨 걸고 해오던 그 모든 일,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인연들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따라나섰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공동체는 어떠합니까? 때로 종교인들이 사회를 걱정해야 하는데, 사회가 종교인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한때 그토록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와 주교, 사제, 수도자들에 대해 호감과 존경을 표시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가뭄에 콩 나듯합니다.
언제나 단골로 등장하는 반성거리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독선과 권위주의, 비전과 리더십의 부족, 미성숙한 언행, 기도와 영성생활의 결핍...
보다 따뜻하고 열린 교회, 너그럽고 관대한 수도 공동체, 성숙하고 다정다감한 본당, 그래서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달려올 수 있는, 그런 가톨릭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구성원 모두 함께 노력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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