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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2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8-22 조회수 : 517

마태오 19장 23-30절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여러분은 도둑입니다 
 
 
아이들과 저녁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개구쟁이 친구가 다가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제게 할 말이 좀 있답니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아이 입장에서는 정말 큰 고민꺼리였습니다. 
 
“신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저희 반 통틀어 핸드폰 없는 사람이 저 포함해서 딱 두 명이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친구’ 외할머니가 핸드폰을 사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은 저희 반에서 핸드폰 없는 사람은 유일하게 딱 한명, 바로 저란 말입니다. 
 
신부님, 입장을 한번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신부님이 제 입장이라면 어떻겠냐고요?
그래서 결론은 뭐시냐, 삼촌한테 잘 이야기해서 꼭 제 소원 좀 들어주게 해달라고요.
신부님, 알겠죠?
신부님만 믿습니다!” 
 
때로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때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애원조로 매달리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또 다른 녀석, 이제는 완전히 자랄 대로 자라서 꽤나 ‘부담스러워진’ 녀석이 저한테 자리에서 일어서보라네요.
왜 그러나 했더니 자기하고 키를 한번 재보자는 것입니다. 
 
한 달 전까지는 분명이 저보다 1cm 정도 작았는데, 이번에는 녀석의 키가 저보다 훨씬 더 커버렸습니다.
드디어 저보다 더 커졌다며 활짝 웃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저녁시간이었습니다. 
 
요즘은 수도회 안에서 별로 영양가 없는 이런 저런 책임을 맡다보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돈보스코의 아들로서, 살레시안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무래도 철부지 녀석들과 함께 티격태격, 아옹다옹할 때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아이들이 하루하루 몰라보게 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보람이었습니다.
흔들리던 아이들이 안정을 되찾고 갈팡질팡하던 아이들이 제 갈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기쁨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들을 동반하면서 얻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돈보스코였기에 이런 말까지 남겼습니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내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이렇게 청소년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항상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내게 있어 단 한 가지 소원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도둑입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청소년의 사도 돈보스코 성인의 탄생일입니다.
오는 2015년이 탄생 200주년이니, 아직 살아계셨더라면 올해로 연세가 196세가 되겠네요. 
 
돈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토리노 근교 베끼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아버지 프란치스코 루이지 보스코와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 보스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린 요한 보스코에게 큰 비극이 닥쳤습니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1817년 5월 11일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입니다.
차가운 지하실에서 일하다가 폐렴에 걸린 지 이레 만의 일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당시 두 살이 채 안되었지만, ‘오라토리오 회고록’에서 애절한 어조로 그 슬픈 사건을 회상합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가 숨을 거둔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따라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비애에 잠긴 어머니는 거듭 타일렀다. 
 
“요한아, 어서 이리 온. 엄마랑 나가자.”
“아빠가 안 가면 나도 안 갈 테야.”
“가엾은 것, 이제 너는 아빠가 안 계시단다!”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리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울었다.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보스코가 사망한 뒤, 말가리다가 이끄는 가족의 재정 상황은 이태 동안의 가뭄과 기근을 고려하더라도 몹시 악화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축 우리에는 암소한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만 있었던 듯합니다.
말가리다의 빚은 프란치스코 소유의 모든 가축을 합한 값에 달했습니다. 
 
돈보스코는 그의 어머니가 이 무렵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신사에게서 아주 유리한 제의, 하지만 아이들은 데려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았다는 사실도 애기합니다. 
 
“아들들은 좋은 후견인에게 맡길 수도 있다는 애기를 듣고” 그녀는 “온 세상의 금을 다 준다 해도 결코 아이들을 버리지 못합니다.”라며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청혼이었고, 젊은 과부가 보통 택하는 행로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말가리다 입장에서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19세기 과부들은 고아들처럼 고대(古代)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존재였습니다.
많은 과부들이 그런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녀의 결정은 영웅적인 것이었으며, 보스코가(家) 아이들은 운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말가리다는 자신의 앞길에 무엇이 놓여있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그녀는 이제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것입니다.
혹독한 노동과 한없는 희생을 감내해도 혼자 벌어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빠듯했습니다.
이렇게 보스코 가족은 1820년대를 힘겹게 버텨냈습니다. 
 
아버지와의 때 이른 사별, 그리고 곧 다가온 혹독한 가난은 솔직히 돈보스코 성소 여정에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체험했던 아버지 부재 체험,
가난으로 인해 견뎌내야 했던 많은 어려움들은 오히려 그가 나중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깊이 투신하는 배경이 되어주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베드로 사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 건강 젊음, 능력, 마음, 사랑, 미래 모두를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예수님이신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무엇을 받았을까요?
엄청난 선물을 받았습니다.
살아있을 때부터 성인 칭호를 들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나 그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던지 신속하게 시복시성 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교육노선에 박수를 보내며 자신의 교육활동의 이정표로 삼았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남녀 살레시오 수도자들, 협력자들, 살레시오 가족들이 돈보스코의 영성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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