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5,21-28
큰 겸손과 강한 믿음의 소유자, 가나안 부인
마귀 들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평소와는 사뭇 다릅니다.
본문을 읽는 동안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던지는 말씀이 상당히 귀에 거슬리고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마귀의 횡포에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 때문에 잔뜩 기대를 안고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이었습니다.
절박하고 딱한 처지에 놓인 여인에게 위로와 기쁨, 희망과 구원을 선사해야 마땅한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청을 강경하게 거부하시며 이방인인 여인에게 ‘강아지’라는 표현까지 쓰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예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면 오해의 소지가 꽤 큽니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후 맥락과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맥락을 잘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전통에 뿌리를 둔 ‘성경의 구원사적 기본 원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에도 순서와 절차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에 도달해야 하며, 그래야 이방인들도 하느님 구원을 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구원에 모든 역량을 기울여야 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지금 현재 이스라엘의 구원이 최우선 관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사람 예수님의 머릿속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의 행동반경을 보면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경로 주변에는 수많은 이방인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던 도시들을 대체로 비켜 가십니다.
대신 갈릴래야 호숫가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들, 특히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머릿속에 이방인들의 구원은 전혀 없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청을 거절하신 것을 통해 이방인들이 그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방인들 때문에 그분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에 집중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하느님의 새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새 세상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우선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결론은 ‘해피 엔딩’이요 초긍정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겸손과 강한 믿음 그리고 절실함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게 합니다.
아직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유와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딸의 치유는 사실 가나안 부인이 얻은 것 가운데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더 큰 선물, 더 큰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 세상에서의 일회적인 치유와 회복뿐이 아니라 영원한 치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하느님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내면 안에서는 큰 도약과 성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자를 넘어 영혼의 치유자란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적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강한 확신뿐만 아니라 철저한 겸손의 덕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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