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2,24-26
우리는 다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가져오라는
황제의 말에 불순종하여 빨갛게 달궈진 석쇠에 순교하였습니다.
황제를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자유로운 시대에는 정말 아무도 섬기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섬길 것, 당신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섬기는 대상이 사는 곳에 함께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섬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라우렌시오 부제처럼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내 목숨을 내어주지 않는데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위해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 어떤 사람은 명예, 어떤 사람은 돈, 어떤 사람은 여자를 위해 에너지를 씁니다.
에너지를 쓴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기는 대상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끔 맹금류들이 폭포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빙하에 얼어붙은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다가 그만 그 얼음에 붙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런 맹금류는 자신의 에너지를 먹는 것을 위해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섬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인간에게서도 일어납니다.
어쩌면 대부분이 그런 우상을 섬깁니다.
누구든 자신이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생명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섬기는 것에 내가 먹히고 만다는 것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시골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기린과 코뿔소를 포함하여 20여 종의 이국적은 동물을
키우는 농부인 마리우스 엘스(Marius Els)는 친구와 가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완용 하마 험프리를 마치 말처럼 타고 다니곤 했습니다.
험프리가 가끔 마리우스가 자신의 등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표현을 했음에도 그는 그냥 장난을 치는 것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이 거대한 짐승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를 먹이고 이빨을 닦아주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마음속으로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자신을 하마의 입속으로 집어넣는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마는 매년 약 500명의 인간을 죽이는 맹수입니다.
이 수치는 사자, 코끼리, 표범, 코뿔소, 버팔로가
인간을 죽이는 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험프리는 아들 같은 존재다.
내가 부르면 달려온다.
또한 나는 그와 함께 수영할 수 있다.
험프리는 내가 등에 올라타도록 허락했고 나는 그를 말처럼 탄다.
나는 험프리와 함께 수영하는 게 좋다.
위협적인 건 알지만, 난 마음속으로 험프리를 굳게 믿기 때문에 괜찮다.”
이 인터뷰를 마친 얼마 뒤 마리우스는 험프리에게 공격당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얼마의 사체만이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이처럼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들이 우리를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의 뱃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예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섬기는 것들의 운명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라면 나도 그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것에게 자신의 목숨을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내가 ‘위하여’ 사는 대상, 섬기는 대상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과 나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면 그 대상은 나에게 먹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먹히는 그 대상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영원히 사는 존재에게 자기를 봉헌하고 그 대상을 먹는다면 어떨까요?
이것은 하나의 선택입니다.
어차피 선택해야 한다면 그 선택의 바탕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투자입니다.
투자는 불확실성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무언가에 투자해야만 한다면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이언은 딸 미스티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사랑받고 자란 딸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딸은 아빠에게 깜짝 선물로 이런 편지와 함께 선물상자를 내밉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멋진 남자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라이언은 약간 실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라고 먼저 불러주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스타워즈 공주처럼 머리를 묶어주셨고 지금까지 평생 저를 키워주셨죠.
그리고 5학년 때는 사인을 위조하다 걸려서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처음으로 함께 록 콘서트에도 가고요.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추억들을 함께 해왔고 그게 바로 아빠인 셈이죠.
아빠 없는 제 삶은 이제 상상할 수 없어요.
아빠를 아빠로 부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음, 그리고 이 편지가 뭘 말하려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그리고 울어도 괜찮아요, 아빠…. 저를 정식 딸로 받아주세요.”
라이언은 울면서 미스티를 안아줍니다.
“내가 이날만 기다렸단다.”
[출처: ‘수십 년만에 의붓딸에게 '입양신청서' 받은 새아빠의 반응’, 유튜브 ‘포크포크’]
나는 어디에 에너지를 쏟나요.
그 대상이 내가 먹히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도 나에게 상을 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생명을 쏟는 그 대상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또 그 대상도 나에게 자녀로 받아달라고 할 때 어쩔 수 없이 서로 먹히는 관계가 되겠지만, 그것을 통해 둘은 영원한 사랑이 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대상에게 먹힙시다.
그러면 그 대상도 영원한 생명으로 나에게 양식이 되어 먹혀주실 것입니다.
결국 섬김은 먹힘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