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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3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7-31 조회수 : 669

마태오 13,31-35 
 
강론에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저는 강론에 항상 비유를 하나 이상 찾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진리를 깨달은 이는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치실 수밖에 없으실까요?
모든 비유를 다 깨달았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은 율법 학자가 꺼내는 옛것과 새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비유입니다. 
옛 비유를 새 비유를 통해 가르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왜 강론에 비유가 들어가야만 진정 비유를 이해한 제자가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오늘 비유 말씀을 이해해봅시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비유 중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다른 비유들에 비하면 조금 해석이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해 놓은 해석은 조금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면 이웃사랑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드는 것처럼 힘들고 쉴 곳이 없는 이웃들이 나에게 와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내 안에 들어와 어떤 변화를 일으킵니다.
왜 서 말일까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가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길처럼 교만한 사람과 돌밭처럼 육체적인 사람과 가시밭처럼 돈 걱정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속, 육신, 마귀의 성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을수록 그 성향들이 줄어들고 부드러운 밭이 됩니다.
그래서 30배의 열매를 맺는 밭이 60배를 맺게 되고 나중에는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 하늘 나라는 생존욕구가 줄어들게 만들어 이웃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멍에를 주시며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가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기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모기는 이웃을 찔러 달아나게 만듭니다.
쉼을 가진 사람만이 쉬게 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체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꿀을 먹어본 이가 그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꿀맛에 관해 설명할 때는 어때야 할까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소재들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꿀맛은 마치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고, 설탕물처럼 달며, 꽃의 향기가 납니다.” 
 
그렇다고 꿀이 연인들의 사랑의 맛은 아니고 설탕물도 아니며 꽃향기와는 또 다릅니다.
만약 이것들을 각자 해석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꿀맛은 연인들의 사랑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설탕물이라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꽃으로부터 왔으니 꽃향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을 잊습니다.
먼저 그 사람이 말하려는 추상적인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꿀은 맛있습니다.”
꿀맛을 보지 못한 이들은 꿀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자신들을 무시하고 놀리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맛을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해버립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꿀은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게 맛있구나! 설탕물처럼 달구나!
꽃향기가 나는 맛있는 무엇이구나!’ 
 
하늘 나라의 비유도 상당히 여러 개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도 하나의 개념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하늘 나라는 결국 성령으로 누리는 하느님 자녀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늘 나라 비유의 개념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는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모의 희생으로 오는 선물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모든 비유는 그 말하려는 개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개념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하려는 사람을 믿고 사랑할 때 비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꿀을 먹어본 사람이 그 꿀이 맛있다는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유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쫓아가서 꿀을 먹어본다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비유를 이해함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비유, 곧 다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모기와 예수’라는 비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가 더 쉽게 이해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하늘 나라를 순종으로 체험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비유를 모두 이해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진리를 알려주는 율법교사가 됩니다.
율법교사가 되면 먼저
1.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2. 그 개념을 비유 말씀을 통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분께 다다르기 위해 비유의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3. 비유를 이해했다면 용기를 내서 그분께 순종하고 자신도 그분이 이끄시려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4. 자신을 이끌어준 비유를 설명하되 새로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5.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뢰를 주기 위해 희생합니다.
그들이 그 비유를 말하는 이를 신뢰하게 된다면 그들도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율법 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유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새로워 비유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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