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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17일_한상우 바오로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6-17 조회수 : 559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무엇을
애타게
찾는지요. 
 
간직하고
되새겨야 할
우리의
깨끗한
본마음을
찾습니다. 
 
깨끗한 마음은
언제나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은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은
이 모든 것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삶이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건너가는
삶입니다. 
 
사랑은 제 마음을
깎는 아픔을
동반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와 같이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어머니도 계십니다. 
 
마음 속을 비추는
믿음의 빛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애타게 다시
부릅니다. 
 
잃어버린 것을
너무나 기쁘게
찾게 됩니다. 
 
애절하게
부를 한 사람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람입니다. 
 
마음 속에
애절한
그 이름을
품고 사는
사람은
아프지만
행복합니다. 
 
담아야 할 마음과
놓아야 할 마음이
분명 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마음과 마음이
만나야 마음의
꽃밭이 되고
믿음의 꽃밭이
됩니다. 
 
찾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마음의 신비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찾는 이 마음이
우리 마음밭을
향기롭게 합니다. 
 
우리 깨달음의
전부는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어디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찾아야 할지를
성모 성심은
잘 보여주십니다. 
 
절실한 마음
애절한 마음
간절한 마음
우리의 마음입니다. 
 
일상의
단순한 것에서
마음을 나누는
성모 성심의
기도와 실천입니다. 
 
성모 성심이여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예수님을 모실
마음의 빈자리를
마련하게
하여 주소서.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 3
6월17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잔소리와 조언을 구분하셨던 성모님! 
 
 
한 그룹의 아이들이 2박 3일간 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게 좋았다, 저런 게 좋았다, 재잘재잘 말들이 많았습니다.
한 아이가 그랬습니다.
“엄마 아빠 잔소리 안 들으니, 처음에는 너무 이상했지만, 정말 좋았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 짧은 세상 살아가면서 쉼 없이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또 반대로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 먹어감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잔소리와 진심 어린 조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잔소리 듣는 것 엄청 싫어하는 데, 어린 자녀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것이 잔소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 역시 아들 예수님을 잘 동반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어떻게 동반하셨는지 부족한 자료를 통해서나마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모님의 동반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동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무렵,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갔다가, 귀갓길에 소년 예수를 잃어 버렸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길을 거슬러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세게가 아니라 넌지시 나무랐습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방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나이 또래 소년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12살 무렵 부터 메시아로서 탁월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언변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를 향한 답변이 엄청 강도가 높았습니다. 아주 세게 나온 것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직감했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서서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거기다 더 이상 또 다른 잔소리를 퍼붓지 않으십니다.
침묵 속에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의 노력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향해 할 말씀을 하셨지만, 듣기 싫은 잔소리로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강약 조절을 하신 것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위해 방관하지 않으시고, 적절히 개입하시고, 그러나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렇게 균형잡힌 동반을 하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 3
6월17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사랑을 사랑이 되게 하는 받아들임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혈육 하나 없이 일생을 고독하게 살아온 노인이 양로원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평생 가꿔온 호화주택을 내놓았습니다. 
 
집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순식간에 10만 파운드까지 집값이 치솟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집값은 올라가고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노인은 허전한 마음에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단돈 1만 파운드만을 들고 집을 사기 위해 노인을 찾았습니다.
“만약 이 집을 저에게 파신다면 어르신은 영원히 이 집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함께 차도 마시고 신문도 읽으며 제가 말벗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결국 노인은 그 집을 젊은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팔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또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집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고독이고, 또 내가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고독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란 상대 안으로 내 존재를 선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어줌’과 ‘받아들임’으로 모든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자신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관계 단절이고 고독이고 죽음이었습니다. 
 
전에 헨델이 가발을 찾아준 여인에게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악보를 선물하였지만 그 여인은 그 악보를 그저 머리 마는 것에 사용해버려 헨델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었음을 말씀드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아무리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해도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랑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성모 성심 기념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에 ‘짝’으로 따라옵니다.
예수 성심은 한 영혼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마음이라면, 성모성심은 그 예수님의 사랑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양 99마리를 남겨놓고 그 1마리를 찾아왔는데도 끊임없이 목자의 마음을 몰라준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아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 성심 기념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에 ‘짝(커플)’로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짝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짝이 자유로이 자신을 받아주는 이라야 내 안의 고독은 사라지게 됩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카사노바처럼 산다면 외롭지 않을까요? 가장 외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안주해야 할지 찾지 못한 떠돌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자신의 갈비뼈를 찾아 나섭니다. 
왜냐하면 그 비어있는 갈비뼈가 채워지지 않으면
영원히 허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또한 남자의 옆구리를 찾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안주하지 못하고 항상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허전함과 불안함, 고독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고 마음 속으로 깊이 새겼던 성모 성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986년 여름, 흑해에서 배 두 척이 충돌해 많은 생명을 앗아간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참사의 원인은 전파탐지기의 고장이나 짙은 안개가 아니고 인간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양쪽 선장은 앞에서 배가 접근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충돌을 피해 배의 진로를 바꿀 수 있었지만 서로 자존심을 내세워 양보하지 않았고, 잘못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강하면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모든 관계는 끝나고 맙니다. 
 
자존심은 자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하십니다. 
즉 요셉을 당신 앞에 놓으십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자존심 상해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존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자아를 죽인 분입니다. 이것이 깨끗함이고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본질적으로 교만한 자아를 죽였다는 뜻인데 그 의미는 자아가 차지하고 있던 나의 공간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비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없어 화를 내거나 없었던 일로 잊으려 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셨던 것입니다. 
 
사랑엔 자존심이 없습니다. 성모 성심을 본받는다는 의미는 아주 단순하게는 자신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랑으로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것을 버린 ‘아멘!’,
이것이 사랑이 사랑이 되고 하는 순결한 성모 성심인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 / 3
6월17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 / 3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2023. 6. 16. 금)(마태 11,25-30)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예수 성심’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심장’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장’은,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구세주의 마음’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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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금.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 29) 
심장
박동소리 만큼
뜨거운 주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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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3
6월16일 [지극히 거룩한 예수 성심 대축일] 
마태오 11,25-30 
예수 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입니다! 
예수 성심, 곧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다시 말해서 그분의 우리 인간을 향한 애끓는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과 심장이 어떠한 것인지를 마태오 복음사가는 명쾌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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