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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6-11 조회수 : 560

요한 6,51-58 
 
성체의 열매: “할 수 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뭐니 뭐니 해도 성체성사로 삽니다.
만약 냉담하게 되는 신자가 있다면 성체성사의 의미와 효과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하셨는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먼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성체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할 수 있음을 믿게 만드는 힘입니다. 
 
어떤 자매가 아기를 낳고는 불안증으로 한강에서 아기와 함께 뛰어내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걸어 잠가도, 친정어머니를 찾아가도 그 불안증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고로 결국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는 아기를 키울 능력이 있다’라는 믿음이 없다면 이처럼 진짜 아기를 키울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어서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키우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애착 실험은 사랑의 실체를 증명하고 싶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어미와 떼어놓고 어미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한 채 키웠습니다.
그리고 교배시켜 또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새끼가 위험에 처하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밀쳐냈습니다.
새끼 때 자신을 안아준 어미 원숭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먼저 어머니의 젖이라는 따듯한 양식으로 전해집니다.
그 양식을 먹은 새끼는 자신도 소중한 존재임을 믿게 되어 어미처럼 할 수 있는 존재라 믿게 됩니다.  
 
옛날 일본의 한 천민 아이가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귀족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주가 새로운 성을 짓는데 그 성 기둥에 들어갈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일본엔 기둥에 사람을 넣고 성을 지으면 그 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오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 기둥에 들어갈 테니 자신의 아이를 그 성에서 사무라이로 교육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성주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약속대로 아이는 귀족 아이들과 함께 사무라이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귀족 아이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해서 밤에 도망치기로 합니다.
몰래 성을 빠져나가던 중 어머니가 들어있다는 기둥을 만납니다.
그는 그 기둥을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결국 그 아이는 기둥을 지나쳐 도망갈 수 없었고 그래서 끝까지 참아내어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가 됩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들어계신 그 기둥에서 힘을 얻어 사무라이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는 죽었고 그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그를 새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아이가 사무라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어머니의 피를 통해 아이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매일의 양식을 먹으며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용서가 안 되는 이유는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다음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바로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배에 맞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분은 물 위를 걸을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요한은 이처럼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겨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장자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피해 도망치다가 베텔(하느님의 집)이라는 동네에서 하룻밤을 묵습니다.
거기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를 봅니다.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다리의 양 기둥은 바로 희망을 상징하고 각 계단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많은 열매를 맺었고 그것을 나중에 에사우에게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 운명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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