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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6-10 조회수 : 544

마르코 12,38-44 
 
봉헌이 어떻게 이웃사랑을 완성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어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사랑이 이뤄지려면 율법만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율법 학자들이 율법은 알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함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비 전체를 봉헌한 과부가 율법 학자들보다 사랑을 더 잘 실천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실천에 봉헌과 무슨 상관인지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봉헌과 사랑 실천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선 사랑은 나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나에게 사랑을 주신 분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사랑이 ‘삼위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만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싸움을 벌여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혈육인 형은 동생이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임금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형은 목숨을 걸고 그 나라를 괴롭히는 괴물을 잡기 위해 나섰습니다.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쪽 팔까지 잃었지만, 결국 형은 괴물을 쳐부수고 임금 앞에 갔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동생의 사면권을 요청하였습니다. 
 
형은 사면권을 들고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동생은 풀려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재판관과 자신을 신고한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형은 사면권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네가 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사면권을 너에게 줄 수 없단다.” 
 
동생은 갈등합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것이 뭐 대수겠습니까?
동생은 형에게 그들을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형은 동생에게 사면권을 주고 동생은 그것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형과 사면권과 동생, 삼위일체입니다.
무엇 하나도 없으면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닌 사랑은 다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상대를 이용하는 이기적인 일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아무리 사랑해도 남편과의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랑은 항상 한계를 지니게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씨도 자기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에 찾아갔습니다.
이것도 삼위일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용서하겠다고 찾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평안한 모습의 그를 보고는 울화가 치밉니다.
그녀는 교회에 돌을 던집니다.
왜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용서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일까요? 왜 사랑이 지속되지 않을까요? 삼위일체의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무엇에 죽어야 할까요? 상대가 나에게 해 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봉헌입니다. 
 
밀양에서 주인공은 하느님께서 용서하라는 명령만이 아닌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게 되는 것이 자기 봉헌입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분께 나의 탐욕의 대상을 봉헌하는 일이 지속되지 않으면 결국엔 그분의 뜻이 내 안에서 지속될 수 없어집니다.  
 
만약 빌 클린턴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도 자기희생을 한 힐러리 클린턴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묵상했다면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 불륜에 빠질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묵상함은 봉헌으로 이어지고 그 봉헌이 나의 욕망을 죽여 상대의 뜻이 내 안에서 지속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하느님 희생이 필요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봉헌은 하느님 뜻을 위한 자기 죽음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의 저명한 작가 C.S. 루이스와 미국 작가 조이 데이빗먼의 사랑은
유명합니다.
독신이었던 루이스에게 조이가 다가옵니다.
조이는 결혼의 실패로 두 아들과 함께 영국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장결혼이 필요합니다. 
 
루이스는 그녀와 위장결혼을 해 주기로 합니다. 그런데 위장결혼 직후 조이가 골수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위장결혼만으로도 조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정식 결혼식을 올립니다. 
 
예상과 달리 조이는 결혼식 후 잠시 차도를 경험하며 함께 몇 년을 더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 루이스의 글쓰기에 조이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도왔고 일부는 조이가 나니아 시리즈를 만드는 데 손을 댔다고도 믿습니다.
또 일부는 루시 여왕의 캐릭터가 그녀를 모델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루이스는 조이를 끝까지 챙겼고 아내의 죽음으로 자신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의 아들도 끝까지 챙기고 위로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루이스는 조이의 아들들을 끝까지 챙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이를 챙기는 것은 루이스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조이를 향한 자기 봉헌이 조이의 아들들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혼을 하고 아이들에게 소홀해졌을 것입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아내를 위해 봉헌했기에 아내의 아들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사랑에 죽지 않으면 삼위일체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피로 죽여야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에 나의 죽음이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이것이 봉헌입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나를 죽여 봉헌하지 않으면 삼위일체의 사랑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신 분을 위해 내가 봉헌될 때야만 삼위일체 사랑이 지속됩니다. 
 
이 때문에 감사의 마음도 없이 일부를 봉헌하는 율법학자들이 아닌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한 과부가 더 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사랑에 봉헌이 꼭 필요한 이유는 사랑이 삼위일체가 되려면 나를 사랑해주신 분께 대한 감사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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