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2,28ㄱㄷ-34
참사랑의 원리
영원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가렛 미첼의 1936년 소설을 바탕으로 한 1939년 미국의 서사적 역사 로맨스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남부의 미인 스칼렛 오하라의 삶과 남북 전쟁 중과 이후의 격동적인 사랑의 삶을 중심으로 합니다.
스칼렛은 아일랜드 이민자 농장 소유주의 딸입니다.
그녀는 강인하고 계산적이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가져야만 식성이 풀립니다.
그녀는 고상하고 지적인 이웃 애슐리 윌크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는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는 그녀를 거부하고 그의 사촌 멜라니 해밀턴과 결혼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사업가 레트 버틀러가 그 대화를 우연히 듣다가 스칼렛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스칼렛은 레트를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상심한 스칼렛은 멜라니의 오빠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레트는 남북 전쟁에 참여해 사망합니다.
스칼렛은 그리 슬프지 않았지만, 슬픈 척을 해야 했습니다.
스칼렛은 끊임없이 멜라니의 남편 애슐리가 전쟁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구애해 봅니다.
그러나 애슐리에겐 멜라니뿐입니다.
멜라니는 사촌 스칼렛의 마음을 알지만, 타고난 침착함으로 스칼렛과 잘 지냅니다.
스칼렛은 이제 망해버린 집안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목재상을 하는 부유한 프랭크 케네디와 혼인을 합니다.
이것 역시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고 남편도 사고로 사망합니다.
이때 스칼렛은 남편의 죽음보다는 애슐리의 부상에 더 마음 아파합니다.
스칼렛의 결단력과 힘을 좋아한 버틀러는 드디어 세 번째 남편이 됩니다.
그리고 버틀러 덕분으로 보니라는 귀여운 딸도 낳습니다.
하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버틀러는 잠자리도 거부하는 스칼렛 대신 딸을 보며 위안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보니도 말을 타다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멜라니가 병으로 죽어가자 스칼렛은 멜라니도 자신에게 큰 존재였음을 깨닫습니다.
또 멜라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전히 자신에게는 관심 없는 애슐리를 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결국 애슐리를 차지할 줄 알았지만, 결국 사랑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은 버틀러뿐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붙들려 하지만, 버틀러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보니도 없는 그 집에 살지 않겠다며 스칼렛을 떠납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사랑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을 자신의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이런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소유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분명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행위가 나를 기쁘게 하는 행위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본성은 뱀이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존재 자체가 본성적으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칼렛에게 뱀은 애슐리에게 집착하도록 하였습니다.
남는 것은 뱀과 공허뿐입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 이유는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으셔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위해 사랑하셔야 했을 텐데 그러면 사랑이 이기주의가 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야 자아의 본성적인 소유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야 나를 기쁘게 하는 이기적인 거짓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명과 함께 생명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한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여 생명이 담긴 양식을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을 먼저 사랑합시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는 그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목적이 저절로 이기적으로 되기 때문에 모기처럼 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내가 그 사랑이 되는 길은 사랑을 사랑하는 길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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